의리없는 전쟁이 시작됐다… ‘윤-한 갈등’에 떠오른 영화 ‘달콤한 인생’[황형준의 법정모독]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예전처럼 거리에서 ‘조폭’(조직폭력배)을 마주치기 쉽지 않은 세상이지만 한국 영화 소재로 조폭은 끊임없이 등장한다. ‘동물의 왕국’과 같은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에 대한 원초적인 향수와 폭력 등 금지된 것에 대한 선망 같은 게 있는지도 모른다. 조폭의 세계는 보스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이를 뒤집는 배신과 음모가 판치는 세계다. 개인과 합리성이라는 서양적 가치관과 공동체와 의리라는 동양적 가치관이 혼재하고, 때론 선과 악을 명확히 가르기 어려운 현실이기에 우리는 영화를 보며 또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가끔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도 있다.
● 다시 회자되는 ‘달콤한 인생’의 대사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
“당 대표 시절 박근혜는 유승민을 믿었다. 비서실장으로 가까이 두고 썼다. 이른바 문고리 3인방도 그때는 유승민의 지휘를 받았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때는 캠프의 핵심적인 자리를 맡겼으니 유승민은 감히 누가 넘볼 수 없는 최측근이었다. 성격이 깔끔하고 일솜씨가 완벽하니 신뢰했을 것이다. 특히 사심이 없어 보이는 유승민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다들 ‘자기 정치’를 하느라고 보스의 이익을 소홀히 하는 게 정치판의 생리인데, 유승민은 예외로 보였을 법하다. 사랑을 모르는 부하이니 자기 애인을 믿고 맡길 수 있다고 판단한 두목처럼, 박근혜도 사심없는 유승민한테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게다.” - 청와대판 ‘달콤한 인생’…“유승민,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김의겸의 우충좌돌> - |
최근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갈등을 두고 여권에선 당시 박 전 대통령과 유 전 의원 간 당정 갈등이 떠오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대통령실과 친윤계 일각에선 한 대표가 ‘제2의 유승민’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는 것. ‘배신자’ 프레임에 갇힌 유 전 의원을 언급하며 일종의 경고장을 던지는 셈이다. 최근 여권의 텃밭인 대구 등에서 국민의힘 지지율이 하락하는 이유에 한 대표에 대한 불만과 ‘배신자’ 프레임이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 ‘보스 尹’의 제 식구 챙기기
윤 대통령은 흔히 보스 기질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석열이형’이라는 친근한 이미지, 풍채 좋은 외모, 소탈한 성격은 사람을 끌기에 충분했다. 최근 만난 검사 출신 변호사의 말이다.
“윤 대통령은 참 인간적인 매력이 있다. 중앙지검장 시절에 자정 넘어 법원의 영장실질심사 결과가 나오면 시간이 늦었으니까 문자로 지검장한테 영장 발부 사실을 전한다. 그러면 ‘수고했다. 어디로 갈테니 기다려라’고 답이 오고 늦은 시간 달려와 같이 술 한 잔씩 따라주면서 격려 말씀을 해주면 후배들은 모두 팬이 될 수밖에 없다.” |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이 되자 중앙지검 차장검사들이 대부분 대검찰청으로 승진 보직됐다. 한 대표는 특별수사를 총괄하는 대검 반부패강력부장(검사장급)이 됐다.
이 같은 인사 스타일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도 유지됐다. 사법연수원에 사실상 유배돼있던 한 대표는 법무부 장관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중앙지검장 시절부터 특수·공안 수사를 도맡아했던 회계사 출신의 이복현 당시 부장검사는 금융감독원장으로 발탁됐다. 검찰 수사관 출신이 처음으로 대통령실 인사기획관과 총무비서관, 부속실장 등 요직에 배치됐다.
● 이탈한 ‘행동대장’
영화 〈달콤한 인생〉으로 돌아가면, 보스(김영철 역)는 젊고 잘생긴 2인자 부하(이병헌 역)를 보며 든든했다. 보스는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묘한 감정이 든다. 보스는 자신의 젊은 애인(신민아 역)에게 남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시를 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보스는 “넌 사랑해 본 적이 없어. 그래서 이런 일을 맡기는 거야”라고 한다. 2인자는 보스의 명에 따라 애인을 감시한다.
보스는 애인에게 남자가 생겼다면 처리하라고 하지만 2인자는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 마음 속 연정 때문일 것이다. 이를 안 보스는 2인자를 제거하려고 한다. 시기와 질투일 수도 있고 자신의 지시를 거부한 데 대한 배신감일 수도 있다.
보스가 보낸 청부업자는 “잘.못.했.음 이 네 마디야. 네 마디만 하면 적어도 끔찍한 일은 피할 수 있다”고 하지만 2인자는 “그.냥.가.라”고 한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2인자는 죽을 뻔하다 살아났다.
보스는 다른 조직 보스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직이란 게 뭡니까, 가족이란 게 뭡니까. 오야가 누군가에게 실수를 했다고 하면 실수한 일이 없어도 실수한 사람은 나와야 되는 거죠.” |
20년 가까이 한솥밥을 먹던 한 대표에게 충성과 의리를 기대했던 윤 대통령에겐 불안한 시작이었을 것이다. 한 대표는 비대위원장 취임사에서 ‘선민후사’를 강조했고 이후 윤 대통령 배우자인 김건희 여사의 명품 ‘디올 백’ 수수 논란에 대해 “국민이 걱정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한 대표는 비대위원장 취임 후 철저히 윤 대통령과 거리를 뒀다. 총선 승리가 최대 과제였던 비대위원장이었기에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을 감안한 전략적 행보였을 것이다. 용산 대통령실에도, 한남동 관저에도 별도로 방문하지 않았고 윤 대통령 언급도 삼갔다. 김경률 당시 비대위원이 ‘디올 백’ 수수 논란을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비교하자 폭발한 대통령실은 급기야 비대위원장 사퇴 요구까지 하며 윤-한 갈등이 본격 시작됐다.
이후 3월 이종섭 전 주호주 대사의 조기 귀국과 ‘언론인 회칼 테러’ 발언 논란을 일으킨 황상무 전 대통령시민사회수석비서관 사퇴를 문제를 둘러싼 2차 갈등, 7월 국민의힘 전당대회 국면에서 벌어진 ‘김건희 여사 문자 무시’ 논란을 둔 3차 갈등 등으로 충돌하면서 윤-한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 한국 정치 꼬이게 하는 윤-한 갈등
윤 대통령과 한 대표는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이슈에 있어서는 끝까지 간다는 것이다. 검사 시절 수사에 있어서도 그랬다. 중앙지검에서 윤 대통령과 한 대표와 함께 근무했던 검사 출신 변호사의 말이다.
“2017년 윤 대통령이 중앙지검장이었던 시절, 적폐청산 수사 피로감에 대한 언론의 지적이 많자 누군가 ‘출구전략’을 고민해야 된다고 했다. 그러자 윤 당시 지검장은 ‘무슨 소리냐. 수사는 나오는 대로 하는 것이다. 다시는 출구전략을 언급하지 말아달라’고 얘기했다. 최근 의대 증원 논란을 보며 떠오른 기억이다.” |
한 대표는 1차 갈등 직후인 1월 23일 서천수산물특화시장에서 윤 대통령에게 90도로 ‘폴더 인사’를 하고 8월 전당대회 직후 만찬에서 러브샷도 했다. 하지만 대통령실 안팎에선 “윤 대통령과 한 대표는 김 여사 문제로 불거진 1차 갈등 이후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평가한다.
의대 증원을 둘러싼 윤-한 갈등과 관련해 대통령실 측에선 한 대표가 중재안을 고위당정협의회가 열린 날 회의가 끝난 뒤에 슬쩍 한덕수 국무총리 등에게 언급한 것에 대한 불만이 크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김건희 여사 문자 무시 논란에서 ‘집권당의 비대위원장과 영부인이 사적인 방식으로 공적이고 정무적인 논의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했던 한 대표가 의대 증원 중재안 제안은 왜 공적 라인으로 제안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며 “1월 1차 갈등 당시 한 대표가 직접 찾아와서 설명했으면 윤 대통령이 못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최근 갈등은 다소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응급실 등 의료 공백에 대한 상황이 나빠지면 언제든 한 대표가 다시 목소리를 키우며 당정 갈등이 격화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 말대로 ‘관리 가능’한 상황이어서 국민 건강권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의료대란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최근 윤-한 갈등을 지켜보다가 19년 전 나온 영화가 중첩돼 다시 봤습니다. 영화는 이렇게 끝납니다. 미묘한 감정에서 시작된 보스와 2인자의 대립은 결국 조직을 초토화시킵니다. 반격에 나선 2인자는 보스와 조직원을 죽이고 그 스스로도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모욕감’이 뭐길래. 두 사람이 오해하지 않았다면, 속내를 털어놓고 이야기했다면, 서로 신뢰하고 이해했다면, 혹은 “잘.못.했.음”이라고 사과하거나 보스가 눈을 감아주는 식으로 한쪽이 물러섰다면, 파국적인 결말은 달라졌을 겁니다.
현실 속에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판단하기 쉽지 않지만 이를 지켜보는 국민 입장에선 조마조마하고, 아쉬움이 있습니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나은 결말이기를 기대해봅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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