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손흥민 10년 만의 재회, 화두는 '존중' [박순규의 현장]
5일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B조 1차전 한국-팔레스타인전 앞둔 기자회견
홍명보 감독과 손흥민, '존중' 강조
[더팩트 | 서울월드컵경기장=박순규 기자] 10년이 흘렀다. 2014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후 홍명보 감독의 품에서 펑펑 울던 막내 손흥민(32·토트넘)은 이제 한국 축구대표팀의 주장으로 10년 만에 다시 만난 홍명보 감독과 함께 나란히 기자회견장에 들어섰다. 패기만만했던 월드컵에서 패배의 쓴 맛을 봤던 홍명보 감독은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다시 한번 한국 축구를 위해 헌신하겠다며 대표팀 지휘봉을 잡고 첫 경기에 앞서 기자회견에 나섰다.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감도는 9월 4일 오후 서울월드컵경기장 인터뷰룸. 5일 오후 8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팔레스타인과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B조 1차전을 앞두고 공개훈련에 앞서 공개 기자회견에 나선 홍명보 감독과 손흥민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담담하게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가졌다.
이날 기자회견은 지난 2월 아시안컵 이후 계속된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축구가 새로운 스테이지에 접어드는 관문이었던 만큼 팬들이과 미디어의 관심도 컸다. 우여곡절 끝에 지휘봉을 잡은 홍명보 감독이나, 대표팀 주장으로 갈등의 중심에서 팬들의 실망을 자아냈던 손흥민 모두에게 팔레스타인과 첫 경기는 무척 중요했던 만큼 기자들의 질문 또한 예리했다.
홍명보 감독은 선수들에게 주로 어떤 주문을 했는지, 선수들은 감독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대표팀 분위기는 어떤지, 10년 전과 후의 다른 점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하지만 대답은 예상했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분위기는 좋다" "재밌는 경기를 하겠다" "이기는 경기를 하겠다" 등등.
그럴 만도 한 것이 이제 막 논란을 딛고 첫 발을 떼는 상황에서 단어 하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불어올 수 있는 파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한국대표팀은 지난 2월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 체제의 아시안컵에서 4강 탈락도 모자라 선수단 내 갈등까지 노출되면서 극심한 홍역을 치러왔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진은 계속 돼 경기를 하루 앞둔 4일까지 6만 3000여 경기장 좌석 가운데 수 천 석이 팔리지 않고 있다. 대표팀 A매치, 그것도 월드컵 최종예선 홈 경기에서 매진이 되지 않는 사례는 최근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례적 경우다.
극히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관심을 끄는 단어는 '존중'이었다. 홍명보 감독도 얘기하고 손흥민도 말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왜 '존중'을 강조할까. 아마도 한국축구대표팀에 가장 필요한 요소가 '존중'이란 말인가. '존중'이 앞으로 대표팀을 이끌어나갈 홍명보 감독의 중심 철학인가. 다른 모든 부분의 답변은 예상 가능한 수준이었지만 '존중'이란 말은 유난히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홍명보 감독은 선수단과 미팅에서 무엇을 주문했느냐는 질문에 '존중'을 말했다. 국가대표팀에 대한 존중, 선수들 간의 존중, 심판진을 포함해 경기를 진행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존중, 팬들에 대한 존중을 밑바탕으로 할 때 한국축구의 건전한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읽혔다. 10년 만에 다시 만난 손흥민에 대한 생각 역시 존중을 바탕으로 했다.
홍명보 감독은 그동안 국가대표팀 주장으로 이길 때나 질 때나 전면에 나섰던 손흥민의 부담을 덜어주겠다고 밝혔다. 홍명보 감독은 "그동안 손흥민이 불필요하게 가졌던 무게감을 감독으로서 나눠지겠다. 앞으로 손흥민의 역할은 시작점부터 끝나는 때까지 중요하다. 불필요한 책임감에서 벗어나서 본인의, 팀 안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4강의 기적'을 일굴 당시 대표팀 주장으로 겪은 희로애락의 경험을 살려 손흥민의 짐을 덜어주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감독의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주장을 지낸 대표팀 선배로서 후배 주장을 배려하는 마음씀씀이가 보였다.
10년 전 홍 감독과 손흥민은 이미 대표팀에서 함께한 경험이 있다. 당시 홍 감독은 "10년 전 손흥민은 아주 젊고 한국 축구의 미래를 짊어진 선수였다. 현재 손흥민은 한국 축구의 모든 걸 짊어지고 있고 우리가 바랐던 모습 그대로 이어졌다"며 손흥민의 성장을 높이 평가했다.
손흥민 역시 홍명보 감독에 대한 존중을 나타냈다. 손흥민은 "대표팀 감독은 선장이기 때문에 부드러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높은 위치에서 카리스마로 선수들을 휘어잡는 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게 중요하다. 선수들 모두 그걸 인지하고 있다. 서로 존중하고 잘 따르면 규율적으로 경기장 안팎에서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손흥민은 "제 역할은 어떤 일이든 앞장서서 솔선수범해 선수들이 따라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선수들은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대표팀이라는 자리의 큰 책임감을 갖고 존중하면서 팬들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고 강조했다.
2011년 데뷔한 손흥민은 지금까지 A매치 127경기에서 48골을 넣고 있다. 팔레스타인전에 나서면 이영표 전 축구협회 부회장을 넘어 통산 A매치 최다 출장 4위에 오르게 된다. 또한 5일 팔레스타인전에 이어 10일 오후 11시(한국시간) 오만 무스카트의 술탄카부스 경기장에서 펼쳐지는 오만과 2차전에 3골 이상을 넣으면 통산 A매치 황선홍(50골) 대전하나시티즌 감독을 넘어 A치 최다 득점 2위로 올라서게 된다.
10년 전 브라질 월드컵의 홍명보 감독 체제에서 월드컵 데뷔골을 넣었던 손흥민과 주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실력으로 재기를 다짐하고 있는 홍명보 감독. 10년 만에 재회한 이들의 '동행'이 과연 해피 엔딩으로 끝날지, 아니면 또 가시밭길을 걸어야할지는 팔레스타인과 첫 경기에서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skp2002@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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