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가 미래다]③ 송배전망 지지부진… 반도체 공장도 못 돌릴 판

정재훤 기자 2024. 9. 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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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주력 대만, 전력설비 노후로 잦은 정전
한전 신규 송변전 건설사업 112개, 착공은 ‘0′
송배전망 절차 간소화 ‘전력망법’ 국회에 계류

정부는 주기적으로 중장기 에너지 계획을 수립한다. 미래 전력 수요를 예상하고 그에 맞는 공급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수립돼야 할 에너지 정책이 정치화되면 그 피해는 국민과 기업에 돌아온다. 에너지 정책 수립 과정의 미비점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대안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지난 6월 엔비디아 대만 지사와 3000여개의 기업이 입주한 타이베이 과학단지에서 정전이 발생했다. 원인은 전력 부족이 아닌 노후 설비로 파악됐다. 약 1시간 동안 지속된 정전으로 AI(인공지능) 슈퍼컴퓨터 등 고전력 장비의 운용에 차질이 생겼고 입주 기업들은 진행 중인 실험을 중단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TSMC 등 반도체 산업을 주력으로 하는 대만은 최근 노후된 전력 계통 문제로 정전 우려가 커지고 있다. 반도체는 대표적인 에너지 집약 산업이다. 지난 7년간 대만에서는 3차례 대규모 정전이 발생했고, 작년에도 여러 차례 소규모 정전이 있었다. 올해 4월에는 대만 북부에서 사흘에 걸쳐 동시다발적인 전력부족 사태가 발생했다. 2022년에는 313건의 정전이 발생했고 500만 가구가 넘게 영향을 받은 대규모 정전도 발생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글로벌 파운드리 업체가 있고 수도권에 대규모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한국도 제때 전력망을 확충하지 못하면 대만과 비슷한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SK하이닉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감도. / SK하이닉스 제공

정부는 반도체 관련 전력 수요가 지난해 4.1기가와트(GW)에서 2038년 15.4GW로 4배 가까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데이터센터 관련 전력 수요는 지난해 0.6GW에서 2038년 6.2GW로 10배 이상 늘어날 전망이다. 통상 원자력 발전소 1기의 용량이 1GW이다. 이에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법(전력망법)을 신속히 추진해 송배전망 사업 절차를 간소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총 622조원을 투자해 2047년까지 용인 일대에 공장 16개를 포함한 대규모 클러스터를 조성한다. 당장 3년 후인 2027년부터 공장 5개가 완공된다. 용인 클러스터에 필요한 전력 10GW 중 3GW는 신규 가스화력발전소 6기로 자체 조달할 계획이지만, 나머지 7GW는 충청, 강원, 호남 지역에서 끌어와야 한다. 송배전망 체계 구축이 반도체 설비 구축보다 늦어지면 공장을 완공해도 가동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송전망 구축 사업은 최근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면제를 받았다. 예타 면제 대상 사업은 14개 노선의 345㎸(킬로볼트) 송전선로로, 2036년까지 준공하는 것이 목표다.

예타 면제에도 향후 행정 절차 속도에 따라 실제 준공 시기가 늦춰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용인 클러스터는 2024∼2027년 입지 선정, 2027∼2028년 환경영향평가, 2028년 주민 의견 청취, 2028∼2029년 실시계획 사업 승인, 2031년 구간별 공사 착수 등 여러 단계가 남아 있다.

서울 여의도 국회./조선DB

업계는 조속한 송배선망 확충을 위해 전력망법 통과가 시급하다고 본다. 이 법은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전력 확충위원회를 설치하고, 대규모 송전만 관련 행정 절차 및 인허가 절차를 가속하는 것이 골자다. 이 외에도 환경영향평가 면제, 합리적 지원·보상책 등 내용이 담겼다.

전력망법은 21대 국회 폐회 전날 극적으로 여야 합의까지 이뤘으나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22대 국회가 들어선 이후에도 이인선 국민의힘 의원, 김한규 민주당 의원 등이 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 법안소위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전력망 사업을 전담하는 한국전력의 악화한 재무구조 역시 송배전망 확충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2분기 말 기준 한전의 연결 기준 총부채는 200조원으로 한해 이자 비용만 4조원대에 달한다. 한전은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송전망 확충에 56조5000억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AI 보급에 따른 전력 수요 증가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지면서 더 많은 금액을 투자해야 할 것으로 전망을 바꿨다.

김정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한전의 ‘10차 송변전 설비계획 추진 현황’ 자료에 따르면, 한전이 지난 2022년 수립한 송변전 설비 신규 건설사업 112건 중 지난 6월 말 기준 착공 단계에 돌입한 사업은 한 곳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절반 이상인 60건(53.6%)은 아직 용역 설계 및 기초 자료를 검토하는 준비 단계에 그쳤고, 나머지 52건은 입지 선정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송변전 설비 건설에 약 3년이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2027년부터 일부 가동이 예정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 공급에도 차질이 생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동철 한전 사장은 지난 7월 ‘전력망 적기확충을 위한 혁신 대토론회’에서 “미래 먹거리가 될 반도체, 바이오, 인공지능 등 첨단산업 모두 전력산업의 기반 위에 존재한다”며 “국가경쟁력 강화와 국민경제 안정을 위해 에너지 혁신기업 생태계를 활성화하고 전력망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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