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보살이 태화강 대밭을 거닐듯
한반도는 서쪽은 평야가 넓고 동쪽은 산악이 높다. 그래서 동에서 서로 흐르는 강은 곡창지대를 적셔주면서 길게 흐른다. 하지만 반대로 동쪽으로 흐르는 강은 길이도 짧고 폭도 좁다. 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천에 가깝다. 남대천 오십천 등에서 보듯 강(江)이 아니라 천(川)으로 불린다. 그럼에도 모여 살 수 있을 만큼 물도 있고 논도 있고 밭도 있다. 연안바다는 또 다른 밭으로 그 역할을 보탰다. 강원도 동해안은 (휴전선에서 가까운 고성만 빼고) 속초부터 삼척까지 전부 시(市) 단위 행정구역으로 이어져 있다. 인구분포도가 영서지방보다 상대적으로 밀집도가 높다는 이야기다. 많이 모여 산다는 것은 살기 좋은 환경이라는 뜻이다.
영동지방 동해바다를 따라 경상도 땅으로 넘어와 쭈욱 내려가다 보면 길이가 짧음에도 불구하고 ‘천(川)’이 아니라 ‘강’이란 이름을 붙인 물줄기도 만날 수 있다. 경주 포항에는 형산강이 있다. 그리고 태화강은 울산 지역을 흐른다. 길이라고 해봐야 수십㎞ 남짓이다. 서쪽 지방으로 흐르는 다른 긴 강들에게 비한다면 매우 짧은 편이라 하겠다. 그래도 지역주민들은 이 정도 물길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대대로 살아왔다. 물길이 짧다고 해서 ‘태화’라는 이름의 역사까지 결코 짧은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념적 시원(始源)까지 염두에 둔다면 그 길이는 족히 2천㎞는 되는 까닭이다.
신라의 자장(590~658)율사는 중국 산서성(山西省)의 대표적 불교성지인 오대산을 순례했다. 643년 무렵 문수보살을 친견한 곳은 태화지(太和池)라는 연못가였다. 조욕지(澡浴池)라고 불리는데 문수보살께서 목욕한 곳이라고 전한다. 위치는 오대(五臺) 가운데 북대(北臺, 해발 3061m 협두봉)와 중대(中臺, 해발 2883m 취암봉) 사이 중간쯤이다. 귀국한 뒤 울산 지역 강변에 절을 창건하면서 사리탑에는 문수보살께 전해받은 사리를 봉안했다. 절 이름은 태화사가 되었고 강 이름은 자연스럽게 태화강이 되었다.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돌로 만든 사리함(보물 441호)은 울산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태화강의 시작점은 만주지방의 ‘태화 연못물’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강 이름 역시 1500년의 역사를 가진 것이다. 고려말 일연(一然·1206~1289)국사도 이 사실을 빠뜨리지 않았다. ‘삼국유사’ 권8 ‘피은(避隱)’편 첫머리에 “영취산(현재 양산 통도사 영축사) 동쪽에 태화강이 있는데 이는 곧 중국 태화지 용의 복을 빌기 위해 용연(龍淵)을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문수(文殊)는 만주(滿洲)와 발음이 비슷한 까닭에 그 지역의 북방민족은 매우 의미있는 성지로 생각했다. 특히 만주족이 세운 국가인 청(淸)나라는 황제가 등극하면 오대산 문수성지 참배를 반드시 공식 일정에 포함할 정도였다. 그 덕분에 문수성지로서의 높은 위상과 함께 큰 사찰들이 대규모로 지어졌다. 지금도 오대산에는 동아시아와 세계 각국에서 참배오는 순례객들로 늘 붐빈다. 그 인파 속에 포함되어 오대산 문수성지는 두어번 다녀왔다. 20여년 전 태화지를 방문했을 때는 안개비가 내리던 을씨년스런 날씨로 기억된다. 나중에 들으니 그날뿐만 아니라 1년 가운데 많은 날이 그런 날씨라고 했다. 오대산 성지 입구에서도 가장 멀고 너무 높은 곳인지라 단 한번의 태화지 순례였지만 절집에 몸담은 이로서 기본의무는 마친 셈이다.
비록 원조가 되는 태화사는 ‘삼국유사’에 이름과 사연만 문자로 남겨두고서(임진란으로 추정됨) 사라졌지만 절집의 누각인 ‘태화루’는 2014년 본래 자리에 복원했다. 권근(權近·1352~1409)은 양촌집(陽村集 권13) ‘대화루기(大和樓記)’에서 “신라 때 처음으로 북쪽 벼랑 위에 절을 세워 대화사(大와 太는 병용한다)라고 하였고 남쪽과 서쪽에 누각을 세웠다”고 했다. 두 개의 누각 중에 한 개는 복원한 것이다. 어쨌거나 경치가 뛰어난 강가에는 누각이 있어야 제격이다. 그래야 강물도 오랫동안 제대로 감상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누각 역시 더욱 빛이 나며 찾아오는 사람의 즐거움도 배가되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도 더운 여름날 방문 일정을 잡았다. 사실은 태화강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십리대밭을 찾아왔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강물은 전국 여기저기 많지만 십리대밭과 함께하는 강물은 흔하지 않은 까닭이다. 태화강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것은 십리대밭이다. 대밭과 강물은 서로가 서로를 꾸며주는 조화로움의 미학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태화강을 따라 군락지를 이루고 있는 십리대밭 역시 긴 역사가 함께한다. 많은 문인들이 태화사 누각에서 태화강과 십리대밭을 바라보며 그 풍광을 노래했으니 고려 명종(1170~1179)대의 방랑시인으로 260여 수의 시가 남아있는 김극기(金克己 호:老峰노봉) 선생은 ‘태화루 서시(序詩)’에서 “숲 아래 고요하고 외로운 절이…(중략) 남으로는 파란 대나무 숲이 물길을 휘감네…(후략)”라고 한 것에서 보듯 대숲의 역사도 강물 역사만큼이나 만만찮음을 보여준다.
사찰과 강물과 대밭의 조화로움으로 인하여 지금도 동네 주민을 포함한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지라 지금은 국가정원(2020년 제2호 지정. 1호는 순천만정원)으로 격상되었다. 워낙 넓은지라 전기순환버스를 탔더니 걷기 좋다는 대밭의 입구에서 내려주었다. 대나무 숲길을 따라 천천히 산책을 했다. 전남 담양의 죽녹원 대밭도 좋았고 일본 교토 아라시야마(嵐山)의 천룡사(天龍寺) 후원에서 만난 빽빽한 죽림도 좋았지만 울산의 십리대숲이 주는 감동도 그 못지않다.
신라의 대나무숲에는 재미난 전설이 있다. 신라 48대 경문왕(841~875)은 어느 날 귀가 자라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당나귀 귀처럼 되었다. 그 사실은 모자를 만드는 기술자만 알게 되었다. 하지만 발설한다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입이 간질거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울화통이 날 지경에 이르자 어느 날 아무도 없는 대나무숲속으로 들어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속이 후련해지면서 바로 홧병이 나았다. 하지만 일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후 바람만 불면 대숲에서 외친 소리가 그대로 축음기처럼 반복되는 것이었다. 십리대밭을 걷다가 그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놓은 그림 아닌 그림을 만났다.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은 시간이란 열차에 우리들을 태우고서 신라시대로 데려다주는 마법사가 된다.
원철 스님(불교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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