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 와인 겁 없이 사들였는데…'그래 이거야' 대전환의 계기 [스프]
심영구 기자 2024. 9. 5. 09:04
[스프카세] 임승수의 와인과 음식이 만나는 순간 ① 리슬링과 주꾸미볶음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가성비 와인과 배달 음식의 페어링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 애호가 커뮤니티에는 갈수록 고가 와인을 겁 없이 구매하는 자기 자신을 성토하는 글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인문·사회 분야의 책을 써서 먹고살다 보니 벌이가 시원치 않은 나도 와인에 막 빠졌던 시절에 이 증세를 심하게 겪었다. 무절제한 구매에 통장이 텅장으로 변해가고, 정신 차리라는 아내의 등짝 스매싱이 구매 독려로 여겨지니, 그야말로 점입가경이었다. 이렇게 주제도 모르고 하이엔드를 지향했던 내가 가성비파로 전향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결혼 10주년인 2019년에 큰맘 먹고 보라카이로 가족여행을 갔다. 숙박했던 리조트의 야외 식당이 워낙 유명한 포토존이라 일찌감치 방문해 자리를 잡고 식사 시간까지 뻗치기를 했다. 그냥 앉아 있기가 민망해서 메뉴판에서 가장 싼 화이트 와인을 골라 한 병 주문했는데, 가격은 10달러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별 기대 없이 마셨는데, 예상외로 '오! 이거 괜찮은데?'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무엇보다도 주문한 해산물 음식과 너무나 잘 어울려서 자기 몸값의 몇 배에 달하는 만족감을 우리 부부에게 선사했다.
'그래 이거야!' 당시 내가 와인을 대하는 태도는 지금과 사뭇 달라서 와인을 주인으로 모시고 음식을 시종으로 여겼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일단 '근사한' 와인을 하나 산 후에 그 와인에 어울리는 음식을 준비해서 마시는 식으로 접근한 것이다. 이렇다 보니 와인에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았고 곁들여 먹는 음식도 제한적이었다. 레드 와인을 마실 때면 습관적으로 고기를 굽고, 화이트 와인을 마실 때면 판에 박힌 해산물을 준비하는 식이었다.
보라카이에서 저렴한 와인에 궁합이 잘 맞는 음식을 붙였을 때 발생하는 화산 폭발급 시너지 효과를 체험한 후 음식이 주인이 되고 와인이 시종이 되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보쌈을 배달시켜 먹을 거면 보쌈과 잘 어울리는 적당한 와인을 준비하고, 삼겹살을 구워 먹는다면 또 그에 어울리는 와인을 마트에서 구매하는 식으로 말이다.
와인이 음식을 거드는 역할로 물러서니 구매하는 와인의 가격대가 전보다 확연히 낮아졌다. 그렇다고 만족도가 크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음식과 와인이 제대로 맞아떨어지면 고급 와인을 마실 때와는 또 다른 만족감과 감동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와인 생활에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 일어났다. '음식이 주인, 와인은 시종!'
앞으로 글을 연재하면서 그동안 체험한 가성비 와인-음식 페어링의 경험담을 하나씩 소개하도록 하겠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이야기다.
어쩌다가 와인 책도 썼다 보니 종종 와인 강의를 하는데, 안주로 주꾸미볶음을 준비해달라고 하면 주최 측에서 의아해한다. 아마도 치즈나 카나페 같은 걸 예상했을 것이다. 와인에 어울리는 추천 음식 정보를 보면 대체로 서양식인 경우가 많다. 애호가의 필수 앱인 와인서쳐에서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검색하면 'Beef and Venison'을 곁들이라고 추천하는데, Venison은 사슴고기다. 해당 정보를 생산한 사람의 식생활 문화가 반영된 것이다. 솔직히 말해 와인을 즐기겠다고 한국에서 사슴고기를 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러거나 저러거나 우리가 평소에 즐기는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을 찾는 게 바람직한 방향이다.
고추장 갯벌에서 이제 막 기어 나온 듯 시뻘건 색을 띠고서는 질끈 파고든 치아를 탱글탱글한 반발력으로 냅다 밀어낸다. 이 당돌하고 감칠맛 가득한 한국 요리 주꾸미볶음에 어울리는 와인은 무엇일까? 내가 강의 때마다 최우선으로 선택하는 2만 원대 화이트 와인을 공개한다. 참고로 동네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청포도 품종인 리슬링은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데 와인으로 만들었을 때 쨍한 신맛과 달큼한 잔당감의 조화가 일품이다. 당도를 높여 스위트 와인으로 양조하기도 하는데, 그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단맛은 애호가들의 감탄사를 불러일으킨다. 음식과 와인의 궁합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한다면, 주꾸미볶음과 드라이 리슬링은 내가 경험한 다양한 조합 가운데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제대로 매운 주꾸미볶음이 다녀가 통증 가득한 구강 내부에 시원한 리슬링이 투입되면 미각 세포들이 진정하기 시작한다. 이내 신선한 산미와 상큼한 복숭아향이 구강과 비강으로 퍼져나간다. 뒷맛에서는 은은한 잔당감이 감도는데 낙지볶음 매운맛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느낌이 참으로 절묘하다. 리슬링에게 이 잔망스러운 잔당감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매운 음식 섭취 후 생뚱맞게 시큼한 레몬을 한입 베어 무는 것과도 같은 당혹스러운 조합이 되었을 것이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가성비 와인과 배달 음식의 페어링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 애호가 커뮤니티에는 갈수록 고가 와인을 겁 없이 구매하는 자기 자신을 성토하는 글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인문·사회 분야의 책을 써서 먹고살다 보니 벌이가 시원치 않은 나도 와인에 막 빠졌던 시절에 이 증세를 심하게 겪었다. 무절제한 구매에 통장이 텅장으로 변해가고, 정신 차리라는 아내의 등짝 스매싱이 구매 독려로 여겨지니, 그야말로 점입가경이었다. 이렇게 주제도 모르고 하이엔드를 지향했던 내가 가성비파로 전향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그래 이거야!'... 전향하게 된 계기
'그래 이거야!' 당시 내가 와인을 대하는 태도는 지금과 사뭇 달라서 와인을 주인으로 모시고 음식을 시종으로 여겼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일단 '근사한' 와인을 하나 산 후에 그 와인에 어울리는 음식을 준비해서 마시는 식으로 접근한 것이다. 이렇다 보니 와인에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았고 곁들여 먹는 음식도 제한적이었다. 레드 와인을 마실 때면 습관적으로 고기를 굽고, 화이트 와인을 마실 때면 판에 박힌 해산물을 준비하는 식이었다.
보라카이에서 저렴한 와인에 궁합이 잘 맞는 음식을 붙였을 때 발생하는 화산 폭발급 시너지 효과를 체험한 후 음식이 주인이 되고 와인이 시종이 되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보쌈을 배달시켜 먹을 거면 보쌈과 잘 어울리는 적당한 와인을 준비하고, 삼겹살을 구워 먹는다면 또 그에 어울리는 와인을 마트에서 구매하는 식으로 말이다.
와인이 음식을 거드는 역할로 물러서니 구매하는 와인의 가격대가 전보다 확연히 낮아졌다. 그렇다고 만족도가 크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음식과 와인이 제대로 맞아떨어지면 고급 와인을 마실 때와는 또 다른 만족감과 감동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와인 생활에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 일어났다. '음식이 주인, 와인은 시종!'
앞으로 글을 연재하면서 그동안 체험한 가성비 와인-음식 페어링의 경험담을 하나씩 소개하도록 하겠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이야기다.
어쩌다가 와인 책도 썼다 보니 종종 와인 강의를 하는데, 안주로 주꾸미볶음을 준비해달라고 하면 주최 측에서 의아해한다. 아마도 치즈나 카나페 같은 걸 예상했을 것이다. 와인에 어울리는 추천 음식 정보를 보면 대체로 서양식인 경우가 많다. 애호가의 필수 앱인 와인서쳐에서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검색하면 'Beef and Venison'을 곁들이라고 추천하는데, Venison은 사슴고기다. 해당 정보를 생산한 사람의 식생활 문화가 반영된 것이다. 솔직히 말해 와인을 즐기겠다고 한국에서 사슴고기를 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러거나 저러거나 우리가 평소에 즐기는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을 찾는 게 바람직한 방향이다.
고추장 갯벌에서 이제 막 기어 나온 듯 시뻘건 색을 띠고서는 질끈 파고든 치아를 탱글탱글한 반발력으로 냅다 밀어낸다. 이 당돌하고 감칠맛 가득한 한국 요리 주꾸미볶음에 어울리는 와인은 무엇일까? 내가 강의 때마다 최우선으로 선택하는 2만 원대 화이트 와인을 공개한다. 참고로 동네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샤토 생 미셸 콜롬비아 밸리 리슬링
청포도 품종인 리슬링은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데 와인으로 만들었을 때 쨍한 신맛과 달큼한 잔당감의 조화가 일품이다. 당도를 높여 스위트 와인으로 양조하기도 하는데, 그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단맛은 애호가들의 감탄사를 불러일으킨다. 음식과 와인의 궁합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한다면, 주꾸미볶음과 드라이 리슬링은 내가 경험한 다양한 조합 가운데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제대로 매운 주꾸미볶음이 다녀가 통증 가득한 구강 내부에 시원한 리슬링이 투입되면 미각 세포들이 진정하기 시작한다. 이내 신선한 산미와 상큼한 복숭아향이 구강과 비강으로 퍼져나간다. 뒷맛에서는 은은한 잔당감이 감도는데 낙지볶음 매운맛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느낌이 참으로 절묘하다. 리슬링에게 이 잔망스러운 잔당감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매운 음식 섭취 후 생뚱맞게 시큼한 레몬을 한입 베어 무는 것과도 같은 당혹스러운 조합이 되었을 것이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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