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아기 안고 피 쏟으며 까마득한 언덕을 올랐다" [스프]

이현정 기자 2024. 9. 5.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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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피커] 보호출산제 도입됐지만 베이비박스 찾는 위기임산부들
 

비주류란 이유로, 마이크를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의 스피커가 되는 저널리즘.
 

한여름 대중교통을 타고 베이비박스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가파른 언덕을 등산하듯 10분쯤 걸어 올라가야 했습니다. 베이비박스가 있는 위기영아보호상담지원센터에 도착해 뒤를 돌아보니 이 까마득한 오르막길을 성치 못한 몸으로 올라왔을 임산부들이 떠올랐습니다. 2009년 겨울 문을 연 뒤 지금까지, 그렇게 2천 명 넘는 아기가 엄마 품을 떠나 이곳에 놓였습니다.
 

"더 이상 굴비상자에서 발견되는 아기가 없도록"

이종락 목사가 처음 베이비박스를 만든 건, 누군가 교회 앞에 두고 간 아기를 발견한 일이 계기가 됐습니다. 아기가 놓인 굴비상자를 길고양이가 긁어대는 걸 보고, 아기를 두고 가더라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튼튼한 상자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쌍둥이가 포개져 있는 걸 보고 더 넓은 지금의 상자로 바꿨습니다. 베이비박스가 유기를 손쉽게 만든다는 비판도 있지만, 절박한 사정의 산모에겐 유일하게 도움을 요청할 곳이기도 합니다.


베이비박스의 바깥쪽 문이 열리면 센터에는 벨이 울립니다. 센터 직원이 안쪽 문을 열어 아기를 꺼내는 사이, 다른 직원은 서둘러 건물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두고 간 사람을 붙잡지 않으면 아기는 영영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사정으로 이곳에 왔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황민숙 주사랑공동체 위기영아보호상담지원센터장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상담받고 가세요" 그러면서 베이비룸으로 모시고 가거든요. "얼마나 힘드셨어요. 아기 잘 지켜줘서 감사합니다" 하면 엄청 울어요. 그동안 쌓였던 게 눈물로 나오는 거죠. 임신 사실을 주변 사람들한테도 말 못 하고 혼자 고민했던 거잖아요. 누구한테도 지지 한 번 못 받아보고요.

센터의 작은 상담실에는 2명이 마주앉을 수 있는 1인용 회색 소파가 있습니다. 소파에는 까만 방석을 두고 앉습니다. 집에서, 또는 병원 밖 어딘가에서 아기를 낳자마자 후처리도 하지 못한 산모가 피를 쏟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태반이 그대로 달려있는 채로 아기를 안고 오기도 합니다. 센터에서 확인한 이런 병원 밖 출산이 올해에만 8건 있었습니다. 산모와 신생아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입니다. 여기까지 오기 전 지난 열 달 동안 이들을 도울 방법은 정말 없었던 걸까요.

 

"유기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아기 엄마들이 남기고 간 편지에는 이런 선택을 하기까지 고민과 좌절이 묻어납니다. 꼭 돈을 벌어 찾으러 오겠다고 약속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다시 만나지 못할 아기에게 용서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황민숙 주사랑공동체 위기영아보호상담지원센터장

2019년에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이 나고, 국회에서 법을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손 놓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낙태는 합법도 아니고 불법도 아니고, 부르는 게 값이에요. 돈이 없는 분들은 낙태를 생각해서 병원에 가더라도 비용이 비싸고, 또 초음파를 보고 아기 심장 소리 듣거든요. 그래서 지방에서부터 베이비박스를 찾아오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꾸 '유기'라고 얘기하는데 엄마들은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 오는 거거든요. 유기할 것 같으면 얼마나 주변에 할 데가 많아요. 그래도 여기에 오면 아기 생명은 살리고, 어딘가 입양을 가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고 오는 거죠.

센터에선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임산부를 3년간 지원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많으면 150가정에 두 차례 기저귀, 분유, 옷 등 육아용품을 보내줍니다. 필요하면 산전 진료와 출산도 돕습니다. 정부 지자체와 달리 지원 대상을 선별하지 않고 상담을 마치면 곧바로 지원하기 때문에 외국인 위기임산부들의 요청도 많다고 합니다.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 아기를 두고 가려던 10명 중 3명이 직접 양육하기로 마음을 바꾼다고 합니다. 취재 당시 센터에는 8월에 들어온 신생아 6명이 머물고 있었는데, 그중 2명이 조만간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습니다.
 

뿌리를 알 수 없다는 한계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기는 2013년 252명으로 가장 많았다가 이후 조금씩 줄어 최근에는 100명대로 떨어졌습니다. 지난해에는 79명으로 유독 줄었는데, 정부의 전수조사 영향이 컸습니다. 지난해 6월 수원에서 냉장고에 영아를 유기한 사건이 뒤늦게 드러난 뒤, 경찰은 출생 신고가 되지 않은 아동에 대해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습니다. 그러자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두고 오면 처벌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임산부들의 발길이 끊겼습니다.

수원 사건을 계기로 올해 7월부터 '보호출산제'가 시행되면서, 이제 '긴급전화 1308'로 상담을 받으면 병원에서 익명으로 출산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집에서 아기를 낳고, 베이비박스를 찾아오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하지만 제도 시행 이후 베이비박스로 오는 아기는 8월 말까지 12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4명보다 늘었습니다. 시행 초기라 아직 제도에 대해 잘 모르는 임산부가 많은 걸로 보입니다.

[관련 기사] 너무나 어렵게 찾은 친모의 첫 말은 "소송 취하해달라"였다... '그림자 아이'까지 보호하려면 ('더 스피커' 2024.07.25.)
[ https://premium.sbs.co.kr/article/zOhccz2Cusk ]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기는 길게는 6개월까지 센터에 머물다가 아동양육시설로 보내지거나 입양을 가게 됩니다. 보호출산제를 이용하더라도 아기가 가게 될 곳은 같지만, 하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두고 도망치거나 상담을 거부하면 아기는 영영 자신의 뿌리를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2019년 우리 정부에 베이비박스 금지를 권고했습니다. 그래서 베이비박스는 정부 미인가 시설입니다. 위기임산부의 최후의 수단인 보호출산제가 갓 시행된 만큼, 당분간은 베이비박스가 사각지대를 메울 걸로 보입니다.
 

생명의 소중함만큼이나 고민해야 할 것

정부는 위기임산부에게 상담을 통해 필요한 지원 정보를 제공하고, 검진 및 출산 비용 등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나이와 소득에 관계없이 한부모가족시설 입소도 가능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대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

보호출산제의 원래 취지는 위기임산부가 국가 상담을 받고 양육을 결정하도록 조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한부모가 된 다음에 지원해 줄게'가 아니라 '위기임산부 때부터 지원해 줄게'여야 돼요. 임신 6개월이 지나면 이때부터 주거, 생계비, 의료비 등에 대한 지원이 있어야 '아기를 낳고도 잘 키울 수 있겠구나'라는 확신을 가질 겁니다. 이런 제도가 미비한 상황에서 아이를 안전하게 출산하는 것에만 목적을 둔다면 보호출산제를 도입하면서 우려했던, '아기를 유기하기 쉬운 제도를 만든 것 아니냐' 하는 부분이 현실화될 수 있는 거죠.

[관련 기사] 5년 동안 단 1만 원 인상... 빈곤에 떠밀리는 '한부모 아이' ('더 스피커' 2024.08.01.)
[ https://premium.sbs.co.kr/article/mmbrhJIfrVu ]

베이비박스를 맡기 전, 미혼모시설에도 근무했다는 황 센터장은 취재를 마칠 무렵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기 아빠는 어디에 있을까요? 엄마 혼자 아기를 만든 게 아니잖아요. 사회는 여성에게만 책임을 전가하고 질타해요."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두고 가는 사람 중엔 어린 커플도, 홀로 아기를 떠맡은 아빠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갓 출산을 한 엄마들입니다. 임신과 출산 과정을 오롯이 맡아야 하는 여성은, 그래서 뜻하지 않은 임신일 때 가장 큰 고통을 받습니다. 여성단체들이 앞장서서 임신 중단권 보장과 한부모 지원 강화, 양육비 미지급 문제 해결을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이현정 기자 a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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