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에게 국가는 없다 [세상읽기]
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지능 원하시면 디엠 주세요.”
최근 몇년 동안 엑스(옛 트위터)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던 글이다. ‘지능’은 “지인 능욕”이라는 끔찍한 표현의 줄임말이다. 즉, 지인의 사진을 개인 메시지로 보내면 나체를 합성한 딥페이크 성착취물을 만들어준다는 얘기다. 요즘은 지인의 얼굴을 도용한 사진이나 영상을 넘어 리듬게임도 쉽게 만들 수 있으니 굳이 남에게 부탁할 필요도 없다. 리듬게임에서는 지인의 일상 사진, 나체 사진, 포르노그래피 영상 등으로 ‘수위’가 점점 올라가는데, 게임이 끝날 때까지 박자에 맞춰 자위를 하면 된다고 한다. 자신들의 ‘작품’을 공유하며 남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 지인인데 한번 해보시고 소감 남겨주세요.”
세상에 이보다 더한 지옥이 있을까. 어느 교사는 자신을 잘 따르던 학생이 특정 신체부위에 대한 조건을 적시한 딥페이크 제작 의뢰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 학교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례가 전국에 퍼져 있다고 하지만 그 실태를 정확히 집계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이다. 가장 기본적인 신뢰와 존중이 사라진 자리에 공포와 분노가 동시에 들어선다. 이런 환경에서 배움과 성장이 가능할까? 어려서부터 성착취를 학습한 남성들은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제대로 된 성교육과 성평등 교육의 부재 속에서 10대들은 일찌감치 잘못된 인식과 행위에 노출된다. 그것은 바로 여성 혐오의 페다고지(교육)와 여성 착취의 방법론이다. 다른 남성들의 부추김 속에 문제의식조차 갖지 못한 채로, 이들은 여성을 마음껏 대상화하고 착취하는 자신을 동료들 앞에 전시한다. 여성을 몇명이나, 어느 수준까지 착취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용자’와 ‘쫄보’를 구분짓는 남성 사회 속에서 이들은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여성에게 가장 폭력적인 자가 가장 남성적인 자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주변 여성들의 사진을 상납하면서도 마음 아파하기는커녕 스스로의 남성성에 뿌듯해한다. 이곳은 여동생을 불법촬영한 남자들이 “부럽다”는 메시지를 받는 세계다.
정부는 황급히 대책회의를 열고 집중단속에 착수했지만, 이는 ‘병 주고 약 주는’ 격이 아닐 수 없다. 이 사태의 책임은 국가에 있기 때문이다. 여성 정책을 뒷전으로 미루고, 여성가족부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지원 예산을 삭감한 것이 바로 정부다. 엔(n)번방 사태가 터지고 나서야 겨우 만들어진 디지털성범죄 티에프(TF)마저 해산시켰다. 경찰은 피해자들이 신고해도 “텔레그램이면 못 잡는다”며 움직이지 않았다. 교육부는 2022 개정교육과정에서 ‘성평등’, ‘섹슈얼리티’ 용어를 전면 삭제했으며, 학교에서 제대로 된 성교육을 제공하지 않으니 부모들은 성교육을 사교육으로 해결한다. 심지어 수천권에 달하는 성교육·성평등 도서가 갑자기 ‘유해도서’로 지정되어 도서관에서 사라지고 있다. 이런 나라에서 훌륭한 성평등 인식이 저절로 생겨날 리 없지 않은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책임은 국가에 있다. “한국 남자는 태생적으로 그렇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근본적 원인도 자신들의 실책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내세운 대책이라는 게 무엇인가? 허위영상물 소지·시청죄 신설, 제작·유통 처벌 강화, 위장수사 확대, 성범죄 예방 교육 등이다. 여전히 ‘개인의 일탈’을 처벌하기 위한 ‘범죄 대응’을 주요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처벌로 문화와 습속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바다. 그렇다면 다음 대책은 무엇인가. 황급히 때려잡을 생각만 하지 말고 장기적 대안을 마련할 수는 없을까? 누가 책임지고 고민할 것인가.
절실하게 경고한다. 우리 사회의 발본적 변화가 시급하다. 정부는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이 막대한 폭력을 끊어낼 의지가 있는가. 여성을 향한 차별과 착취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국가는 과연 누구의 국가인가? 특정 집단의 고통을 선택적으로 방치하는 국가도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끝까지 우기는 지도자가 아니라, 성착취·성범죄는 구조적 문제라고 천명하는 지도자를 원한다. 그래야 제대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우리 사회를 뿌리부터 쇄신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여성들에게 국가는 없다. 그렇게 여성들이 등 돌린 자리에는 미래도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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