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만 40분” 랩 레슨, 한국 힙합만의 진풍경 [콘텐츠의 순간들]

강일권 2024. 9. 5.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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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레슨 논쟁은 한국 힙합 특유의 현상이다. 팬들은 돈을 주고 랩을 배우는 게 힙합의 태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다. ‘미국도 마찬가지’라는 반박은 사실이 아니다.
2022년 방영된 엠넷 <쇼미더머니> 시즌 11의 프로듀서진. <쇼미더머니>는 랩 레슨이 인기를 끌게 된 배경으로 꼽힌다. ⓒ엠넷 제공

한국 힙합 신에는 미국이나 유럽 힙합 신에선 접하기 어려운 이슈가 몇 개 있다. 랩 레슨 논쟁은 그중 하나다. 일반 대중이라면 랩을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가 왜 문제일까 싶겠지만, 힙합이란 특수한 문화 안으로 들어오면 상황이 좀 달라진다. 다른 분야와 달리 랩은 스스로 영감을 얻어 습득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이는 랩이 생겨난 독특한 과정 때문일 것이다. 랩은 1970년대 파티장에서 탄생했다. ‘힙합의 아버지’ 디제이 쿨 허크(DJ Kool Herc)의 옆에서 호스트를 봤던 ‘최초의 래퍼’ 코크 라 록(Coke La Rock)이 사람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본능적으로 말을 뱉던 게 시작이다. 이후엔 슬럼가의 젊은 흑인들 사이에서 일종의 놀이처럼 여겨지며 퍼져 나갔다. 랩은 단순한 놀이에서 이내 경쟁의 도구가 되었다. 거리에서 랩 배틀을 벌이며 자신을 최고라 추켜세웠다. 상대를 ‘리스펙트(존중)’할 순 있으나 굽히지 않는 것이 래퍼들의 세계에선 불문율이나 다름없었다. 이 같은 래퍼들의 태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중이다. 한국 힙합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국내는 랩 레슨이 꽤 활성화되어 있다. 처음에는 소수에 의해 암암리에 진행되었으나 수요가 급증했다.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엠넷)가 계기였다. 방송에 나가 스타가 되는 래퍼들이 늘어나자 래퍼는 동경의 대상, 새로운 장래 희망이 되었다. 10대부터 20대까지 랩을 배우려는 이가 늘었다. 레슨은 래퍼들의 주요 수익 창구가 됐다. 레슨 경험이 있는 이들에 따르면 〈쇼미더머니〉가 방영되거나 새 시즌이 다가오는 기간에는 특히 레슨비가 상승한다. 평소엔 한 달(주 1회)에 25만~30만원 선이던 레슨비가 50만~60만원까지 오른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한국 힙합의 헤게모니를 쥐어온 〈쇼미더머니〉가 남긴 진풍경이다.

그런데 많은 힙합 팬은 랩 레슨을 힙합의 멋에 반하는 행위라고 여긴다. 본능적인 예술 형식으로 일컬어지는 랩, 자기과시를 기본으로 삼는 래퍼의 모습과 레슨이 괴리되는 탓이다. 불화가 생기면 가차 없이 ‘디스’하고 누구와도 랩으로 경쟁하려는 래퍼가, 또 다른 래퍼에게 비용을 내고 ‘과외’ 방식으로 랩을 배우는 데에 좀처럼 몰입하지 못한다. 가르치는 쪽을 향한 비판도 있다. 래퍼들이 과시하는 수익, 이른바 ‘랩 머니’는 음악 활동으로 번 것이기에 팬들로부터 추앙받는다. 랩 레슨으로 벌어들인 수익을 랩 머니로 보는 것에 회의적인 팬들이 많다. 음악 활동에서 벗어났다고 보기 때문이다. 레슨은 ‘래퍼 판타지를 깨버리는 행위’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2019년 2월7일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노매드호텔에서 열린 워너 뮤직 프리-그래미 파티에서 노래하고 있는 닙시 허슬. ⓒAFP

일각에서는 ‘미국 래퍼들도 레슨을 한다’고 맞받는다. 진실은 어떨까? ‘미국 랩 레슨’의 예시로 곧잘 거론되는 인물은 고 닙시 허슬이다. 그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음악 교육기관 ‘1500 사운드아카데미’에서 랩을 가르친 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래퍼들 같은 개인 레슨을 한 건 아니었다. 슬럼가 출신 젊은 흑인들이 범죄의 길로 빠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던 닙시 허슬은 인디 아티스트로 성공한 후 꾸준히 고향과 청년들을 위해 자선사업을 벌여왔다. 1500 사운드아카데미는 랩뿐만 아니라 음악과 관련한 여러 분야를 가르치고 산업 전문가와 창작자를 배출하는 정식 음악학교다. 닙시 허슬이 이곳에서 래퍼를 꿈꾸는 이들을 가르친 것도 그 자선사업의 일환이었다. 닙시 허슬과 더불어 랩 레슨의 예시로 꼽히는 피프티 센트(50 Cent)와 릴 베이비(Lil Baby) 역시 단편적 사실만을 바탕으로 정보가 와전된 데 가깝다. 그들은 돈을 내고 랩을 배운 적이 없다. 한국 힙합에서 행해지는 랩 레슨의 정당성, 혹은 당위성을 변호하기 위한 근거로 삼기엔 무리다.

랩을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 자체는 터부시할 일이 아니다. 레슨을 통해 랩이나 힙합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다만 누구에게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위해 배우는가가 관건이다. 랩 레슨을 둘러싼 실질적 문제들은 대부분 이 지점으로부터 발생한다.

“해외 힙합 뮤직비디오만 보고 왔다”

랩 레슨을 경험한 이들에 따르면, 레슨을 찾는 가장 큰 목적은 신(힙합판)에 진입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현역에서 이름이 어느 정도 알려진 래퍼들과의 교류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레슨은 그들과 안면을 틀 기회다. 이후 레슨 과정에서 친분을 쌓고 랩 실력을 인정받으면 그들이 데뷔의 활로를 열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레슨은 그 자체로 일종의 오디션 과정과 같다. 그렇다 보니 커리큘럼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거나, 애초에 커리큘럼 자체가 없는 허술한 상황 속에서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레슨을 받는 이는 ‘혹시라도 관계가 틀어지면 내 손해’라는 생각에 지배된다. 돈을 내면서 눈치까지 봐야 하는 것이다.

물론 전부 그렇지는 않다. 처음부터 레슨생의 열정, 기본기, 목표 의식 등을 신중하게 파악한 다음 싱글이나 앨범 제작을 마지막 단계로 정하여 커리큘럼을 운영하는 랩 선생도 있다. 레슨을 통해 신인을 발굴하고 그들의 데뷔를 도와주는 셈이다. 이들은 레슨생의 자질이 일정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레슨을 조기에 끝내거나 아예 시작하질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극소수 사례는 레슨생들의 바람에 그친다. 레슨을 경험한 한 지망생은 “첫 2회 레슨 동안 해외 힙합 뮤직비디오만 보고 왔다. 강사는 ‘영감을 얻기 위해서’라고 했다”라고 말했다. “잡담만 40분쯤 하고 정작 랩에 대한 피드백은 10분 받고 끝났다” “선생이 ‘급한 일이 생겨서 나가봐야 한다’며 음악만 틀어줘서 음악만 듣고 나왔다”라는 등 불합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레슨을 통해 랩 실력을 향상시켰거나 랩 잘하는 노하우를 배웠다는 후기는 찾기 어렵다. 가르치는 이들의 목적과 배우는 이들의 목적이 서로 다르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최근 래퍼 이센스가 지적한 것처럼 실력을 갖추지 못한 래퍼들이 약간의 이름값과 오디션 경력을 내세워 레슨을 하는 행태도 불만족스러운 랩 레슨에 한몫한다. 그런 래퍼들에게 레슨을 받는다고 해서 과연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레슨이라는 풍조는 만연해 있지만, 과연 ‘레슨을 거쳐 인정받는 래퍼’가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면 회의적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 힙합에서 행해지는 랩 레슨의 이면에는 이 밖에도 많은 논란거리가 도사린다. 랩을 배우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르치는 이들의 무책임한 태도와 배우는 이들의 뒤틀린 욕구가 맞물리며 랩 레슨은 기이한 현상이 되어버렸다. 이제부터라도 건전하고 발전적인 랩 레슨을 위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터놓고 이야기하며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없애는 것이 답이 아니라면 바꿔야 한다.

강일권 (음악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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