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前 대통령 수사’가 전통이 된 나라
‘법 앞에 평등 vs 정치 보복’ 갈려
정권 바뀔 때마다 반복… 국민 갈등
다시 전직 대통령의 시간이 오고 있다. 검찰이 문재인 전 대통령을 뇌물 수수 피의자로 적시한 만큼 조사는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기시감을 주는 망신 주기 수사 내용도 흘러나온다.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울 때부터 언젠가 맞닥뜨릴 운명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 임기 후엔 누구나 짊어져야 할 숙명인가. 전직 대통령이라도 비리가 있으면 끝까지 수사하겠다는 검찰의 공명정대함인가.
여론은 진영 따라 갈린다. 한쪽에선 그렇게 적폐 청산을 부르짖던 문 전 대통령의 ‘내로남불’을 지적한다. 법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거다. 다른 한쪽에선 사위의 월급이 어떻게 뇌물이 될 수 있냐며 정치 보복을 주장한다. 되레 명품백이 명백한 뇌물이라고 맞받는다.
의도했든, 안 했든 앞으로 ‘사정 한파’가 정국을 강타할 것이다. 정치공학적 셈법으로만 보면 당정엔 호재다. 야당의 탄핵 정국 조성을 선제적으로 막으면서 전장과 공수 역할을 바꾼다. 지지층이 결집하고 ‘윤·한 갈등’도 국민적 관심사에서 멀어질 수 있다. 이에 맞서는 더불어민주당도 친명·비명 간 계파 갈등을 뒤로하고 단일대오로 나선다. “노무현 전 대통령 때와는 다르다”며 정치 보복 대응 태스크포스(TF)를 꾸려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11년 만의 여야 당대표 회담으로 어렵게 조성된 협치 분위기가 빠르게 사그라든다.
시시비비나 정치적 노림수를 떠나 전직 대통령 수사는 국가적으로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벌써 몇 번째인가. 이러다간 전통이 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상대를 낮추고 망신 주면 내가 빛날 거라는 후진적인 정치 문화에 원인이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미국은 대통령기념관 유치전을 벌일 정도로 퇴임 대통령을 우러러보고 영웅시한다. 다 허물이 없는 건 아닐 텐데도 그렇다. 공(功)은 키우고, 과(過)는 줄여 영웅 만드는 문화도 영향을 줬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보여 준 화합의 리더십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역대 대통령 중 정치 탄압을 가장 많이 받은 이는 DJ였다. 박정희 유신 체제에선 현해탄 망망대해에서 수장될 위기를 겪었고, 1980년 ‘서울의 봄’ 땐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도 받았다. 그럼에도 산업 근대화를 이끈 지도자로 높게 평가해 박정희대통령기념관 건립에 앞장섰다. 12·12 군사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도 청와대로 초청해 최규하·김영삼 전 대통령과 똑같이 예우했다. 좌우 극단의 이념 갈등이나 진영 논리가 끼어들지 못했다.
전직 대통령에게 정치 보복의 칼날을 휘두른 건 이명박(MB) 정부와 문재인 정부다. 2008년 집권하자마자 광우병 시위로 개혁 동력을 잃어버린 이명박 정부는 노 전 대통령 수사로 국면 전환에 나섰다. 모멸적이고 망신 주기 행태의 수사는 노 전 대통령의 자살로 귀결됐다. 증오와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 온 좌파는 복수의 때를 기다렸고, 탄핵과 촛불집회로 정권을 잡은 문재인 정부에서 폭발했다. MB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서초동 포토라인에 세웠고 감옥에 보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직 대통령을 이 잡듯 수사하니 노무현 정부를 마지막으로 청와대 초청 전직 대통령 만찬도 끊겼다. MB 땐 보수 진영의 전직 대통령만 불렀고, 문재인 정부 땐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가 없었다.
윤석열 정부 역시 이 악순환의 늪에 발을 담그는 모습이다. 용산은 “정치 보복은 일방적 주장”이라고 했다. 여당에선 법률과 규정에 따라 진행되는 정당한 수사를 전직 대통령이라고 해서 중단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앞선 정부의 레토릭과 다르지 않다.
우리도 미국처럼 퇴임 후에도 국민과 함께하며, 대통령 특사로 활약하는 멋진 전직 대통령들을 가져 보는 건 사치이고 욕심인 걸까. 전직 대통령 잔혹사는 지금도 배부르다.
김경두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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