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영국기자도 치를 떤 일제 만행…역사적인 의병사진 남겼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유인석·이강년·허위·최익현·연기우·윤인순·허겸·노재훈…. 얼마 전 구한말 항일 운동의 전면에 나섰던 대표 의병장 및 독립투사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자료가 발굴되었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과 국가유산청이 일본에서 구입 환수한 자료는 항일 의병장 및 독립운동가가 작성한 친필 편지 등 13건 등이다. 일제 헌병 경찰이었던 아쿠타가와 나가하루(芥川長治)가 1939년 두루마리 형태로 묶어 보관한 문서들이다.
■재현된 분서갱유
이중 유중교(1832~1893·유인석의 스승)와 최익현(1843~1906)의 편지 등 4건에 붙인 아쿠다가와의 주석이 눈길을 끈다.
즉 “…1918년 4월 의주헌병대가…국경을 넘어…<의암집>을 편집하는 곳을 급습하여 압수한 다수의 불온문서 중 일부”라 했다.
이를 두고 어윤적(1868~1935)의 <극재일기>는 “일본군이 서간도로 망명한 유인석·유중교 가문의 집을 습격해서 서책을 불태우고 <의암집> 50여 질을 탈취했다”면서 “분서갱유의 화를 오늘 다시 본다.”(1918년 음1월 20일)고 개탄했다.
군대해산 직후(1907~)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항일 의병 시기에 의병장들이 주고받은 ‘육필 편지’가 심금을 울린다.
13도 창의군의 제2대 총대장이었던 허위(1854~1908)가 경찰에 체포되자 세째형 허겸(1851~1939)은 “분통해서 죽고자 해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다”(5월17일)고 토로했다. 그러나 허겸은 “힘을 더 쏟고…같은 마음으로 협력해야…국권을 회복하고 생령을 보전하며, 강토를 온전히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의병 부대의 단합을 강조했다. 노재훈도 “우리 대한의 일은 어찌 이에 이르도록 참혹하냐”고 가슴을 치면서도 “전국의 동지들이 각골명심하여 흥복(興復)의 희망을 일으켜야 한다”(5월24일)고 다짐했다.
이번에 환수·공개된 자료는 헌병(혹은 헌병경찰)을 지낸 아쿠타가와(혹은 그의 사주를 받은 부하들)가 1907~1909년에는 의병 탄압 과정에서, 1918년에는 만주의 <의암집> 간행 장소에서 각각 탈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환수 자료는 당대 내로라하는 의병장들이 친필로 주고 받은 문서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격문이나, 문집, 사서 등에 수록된 자료는 더러 있지만 유력한 의병장·독립투사들이 항일투쟁에 나서는 심경과 각오, 또한 격리·분산된 상황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갈등 등을 이처럼 생생하게 써내려 간 문서는 보기 드물다.”(박민영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김상기 충남대 명예교수)
■일제가 인정한 친일파 기자
필자는 106~115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의병 문서 자료를 보고, ‘한 장의 사진’을 떠올렸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하는 항일 의병 사진의 모델이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영국 <데일리 메일> 특파원인 프레더릭 아서 매킨지(1869~1931)가 1907년 항일투쟁에 나선 의병을 현장에서 찍은 2장 중 한 장이다. 이 두 장의 사진 외에 남아있는 항일 의병 사진은 남아있지 않다.
1869년 캐나다 퀘벡주에서 태어난 매킨지는 영국·스코틀랜드계 언론인이다. 영국 <데일리메일> 극동특파원이었던 매킨지는 러·일전쟁(1904~1905)의 종군기자로 한국에 왔다. 당시 영국은 일본의 맹방이었고, 매킨지 역시 대표적인 친일파 기자였다.
다수의 서양기자들이 러·일전쟁의 종군을 신청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매킨지 등 2~3명에게만 종군을 허락했다.
“…일본 신문들은 일본군을 칭찬하는 매킨지의 기사를 매일 받아 썼다. 일본의 조야가 매킨지를 환영했고, 마침내 일왕의 훈장까지 받았다.”(1920년 12월 임시정부 파리위원회가 간행한 ‘구주의 우리사업-정의의 친우’에서)
매킨지는 ‘러시아 전쟁포로들을 관대하고 다루고, 규율마저 확실한 일본군’을 극찬하는 글을 계속 실었다.
그런데 러·일 전쟁 후 귀국했던 매킨지가 1906년 다시 한국에 돌아오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군대 해산과 박승환 참령의 자결
매킨지가 친일파에서 항일 투사로 변신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1907년 일어났다,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퇴위하고(7월20일) 정미7조약(7월24일)에 따라 한국 군대가 해산됐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8월1일 오전 8시였다. 항전의 방아쇠를 당긴 이는 서울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1869~1907)이었다. 대대장실에서 대성통곡한 박참령은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 충성을 다하지 못하니 만 번 죽어도 애석하지 않다(軍不能守國 臣不盡忠 萬死無惜)”는 유서를 남긴 뒤 권총으로 자결 순국했다.
당번병의 “대대장 자문(大隊長 自刎·자결)!” 외침이 도화선이 됐다. 연병장에 도열해 있던 병사들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면서 무기고 문을 부수고 무장했다. 삽시간에 병영을 장악한 한국군은 일본군과 3시간 가까이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이날 전투로 일본군 40여명이 사상했고, 한국군은 사상자 170여명(전사 70여명, 부상 104명), 포로 600명에 달했다.(조선주차군사령부 편, <조선폭도토벌지>·1913) 성벽을 넘어 탈출한 부대원들은 지방으로 속속 내려가 그곳 의병들과 합세했다.
■‘의병봉기, 일본군 학살’의 진실?
어찌됐든 군대는 해산되었고, 서울은 평온을 되찾는 듯했다. 매킨지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서울 시민들은…무기력한 그들은 조국을 빼앗기는 꼴을 보고도 감히 한마디 반항도 하지 못했다.…일본군이 거리를 누볐고, 백의민족은 발걸음 조차 조심스러워했다.”
그러나 분위기가 수상해졌다. 곳곳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패주한 일본 진압군이 온 마을을 유린하고 주민들을 대량 학살한 이야기가 흘러들어왔다. 매킨지는 믿을 수 없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무척 의심스러웠다…나는 러·일 전쟁 때 일본군에 종군했을 때 일본 군인들의 자제력과 군기가 훌륭한 것에 감탄했다. 그들은…난폭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갈수록 의병 관련 언론 보도가 봇물처럼 이어지고, 항전을 외치는 온갖 격문이 서울로 전달되었다. 급기야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가 지방 폭도들의 소탕을 공언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명색이 기자, 그것도 한국 특파원이었던 매킨지는 가만 앉아있을 수 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꽤 심각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 전투를 직접 보기로 결심했다.”
쉽지 않았다. 통감부는 ‘신변 안전’을 이유로 통행권 발부를 거부했고, 영국 정부까지 동원해 매킨지의 종군을 막으려 했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 모두 “결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우려했다. 그럼에도 매킨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말 두 필 및 당나귀 한 필, 그리고 수행일꾼 4명과 함께 길을 떠났다.
■속속 드러나는 진실
매킨지는 취재길에 잿더미가 된 고을과, 주민들의 일관된 ‘일본군 만행’ 증언을 접하며 충격에 빠진다.
“(경기) 이천으로 향하는 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70~80가구 정도의 마을은 기둥 하나도 성한 것이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벽안의 기자’(매킨지)을 찾아와 그들이 겪은 끔찍한 이야기를 당당하게 증언했다.
“일본군은 집을 불태우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노인을 쏘아 죽였다. 한 임산부는 해산이 가까워 집에 누워있다가 참변을 당했다…또 어떤 청년은 불타는 집에 뛰어들어가 가문의 족보를 구하려다가 일본군이 쏜 총에….”
충북 제천과 충주의 상황도 끔찍했다. 매킨지는 “충주와 제천 사이의 마을 중 5분의 4가 불에 탔다”고 전했다. 이 와중에 미처 피하지 못한 남녀와 아이들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뿐이랴. 총칼을 든 일본군이 남편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부인을 능욕했다. 심지어 10살짜리 여자아이에게 총을 쏴 죽인 천인공노할 증언도 들었다.
항일 의병의 발걸음을 뒤쫓던 매킨지는 권총 습격을 가까스로 피하기도 했다. “강원도 원주…옥수수 밭 주위에 서있는 소나무 뒤에서 어떤 남자가 무언가 만지작 거리다가…잠시 후 ‘핑’하는 소리가 내 귓전을 스치고 지났다.”
■‘그들의 애국심을 보았다’
매킨지 일행은 의병 출몰이 예상된다는 ‘경기 양근(양평)’으로 들어섰다.
10여개의 적십자 깃발이 마을 곳곳에 걸려있었다. 일본군이 적십자 깃발을 단 집은 불태우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돌아 집집마다 걸어두었다는 것이다. 매킨지는 양근의 한옥 뜰에 숙소를 정했다.
그날 오후 마침내 매킨지의 바람이 이뤄졌다. 그토록 만나보고 싶어했던 의병 5~6명이 나타나 매킨지 앞에 도열해 인사했다.
“18~26세 사이의 청년들이었다. 준수하고 훤칠한 청년은 구식 군대 제복 입고 있었다. 다른 두사람은 군복 바지, 두사람은 초라한 누더기 한복 차림이었다…여섯 명의 총이 제각기 달랐는데 녹까지 슬어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매킨지는 이들을 보고 “희망없는 전쟁에서 이미 죽음이 확실해진 이 사람들이 매우 측은하게만 보였다”고 했다. 이런 무장으로 일본 정규군과 싸우다니…. 그러나 매킨지는 곧 “의병의 영롱한 눈초리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고 그들의 애국심을 보았다”고 했다.
“그들은 ‘어차피 우리는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보다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라 했다.”
매킨지는 “그들을 가엾게 여겼던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서 “그들은 동포들에게 애국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고 밝혔다. 밤중에 의병대장이 매킨지를 찾아왔다. 의병장은 매킨지에게 “…제발 무기 좀 구해달라.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매킨지는 “기자라는 직업윤리상 그럴 수 없다”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가 만난 의병장은?
매킨지가 만난 의병장은 누구일까. 매킨지가 방문한 1907년 8~10월 사이에 양근(양평)에서 활약한 의병부대를 꼽아 보면 어떨까. 우선 1907년 8월3일 지평분파소와 관사 등을 공격한 조인환 의병장(1878~1909)이 우선 떠오른다. 그의 뒤를 이은 퇴역병 출신의 신창현(1881~?)과 해산군인 등 19명을 거느리고 활약한 김영준(1868~1910) 등도 있다. 이밖에 김현규·김현벽·최태평·김춘수(이상 생몰년 미상) 의병장 등도 있다. 그 분들 중 주인공이 있을까.
어찌되었던 매킨지는 “그날 밤이 새도록 부상병을 치료해주고, 그들의 누더기 옷을 빨아주었다…음식도 먹여주었다”고 썼다. 다음날 의병들은 만날 때의 그 ‘보잘것 없는 장비와 열악한 차림으로’ 열지어 떠났다. 매킨지는 “의병들이 우리 일행이 소지했던 무기들을 가져갔을까 잠깐 의심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고 했다. 의병들은 아무리 처지가 궁하다 해도 남의 물건을 훔치는 무례한 짓은 자행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역사적인 사진 ‘찰칵’
그날 숙소를 빠져 나온 매킨지 일행이 강변에서 닿았을 때였다.
또다른 의병들에게 포위됐다. 꼭 쏠 것 같았다. 매킨지는 큰 소리로 “난 영국인이오!”라 외쳤다. 다가온 20여명의 의병 중 신식 제복을 입은 청년이 지휘관이었다.
“그중 못생긴 의병이…말했다. ‘당신이 소리친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었소. 막 당신을 쏠 참이었소’라고….”
14~16세 정도 밖에 안 된 소년도 있었다. 매킨지가 불쑥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나는 그들을 한 곳에 서게 하고 사진을 찍었다…이 사진을 보면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매킨지가 이때 천고에 길이 남을 의병 사진을 찍은 것이다. 그들과 역사적인 만남을 끝낸 매킨지는 전날 항일 의병과 일본군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마을에 도착했다. 그 전투에서 의병 5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그중 3명은 매킨지가 새벽까지 치료해준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2명은 일본군에게 붙잡혀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마을 주민들의 증언이 끔찍했다.
“일본군이 총검으로 중상자 두 명이 완전히 죽을 때까지 찌르고 또 찔렀습니다. 그들의 몸을 조각조각을 냈습니다. 주민들이 시체를 주워 모아 묻어 주었습니다.”
■학살의 생생 증언
사실 한말 의병 투쟁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희생자가 나왔는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다만 일본군의 <조선폭도토벌지>에 따르면 군대해산 직후인 1907년 8~1908년 12월 사이 전사한 항일 의병수가 1만5189명에 달한다. 그것은 일본군 자료일 뿐이다.
“희생된 항일 의병의 수가 10만명이 넘고, 양민 피살자는 독립 후가 아니고서는 그 통계를 구할 수조차 없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기록도 있다. 안중근 의사(1879~1910) 역시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의 15가지 죄상 중 9번째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항일의병과 그 가족의 희생자가 10만명에 이르게 한 죄’를 꼽았다.
또한 대한매일신보와 <한국통사>, <매천야록> 등 여러 사료에서도 의병 및 양민 학살 기록은 곳곳에 등장한다. 그러나 제3자, 그것도 서양 기자가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터를 누비며 기록한 생생자료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상당수가 과장 혹은 터무니없는 거짓으로 치부되었을 지 모른다. 그런 까닭에 매킨지의 발품 기사와 사진은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객관적인 사료가 되는 것이다. 천고에 빛나는….
항일 의병 현장을 몸소 경험한 매킨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물론 의병의 봉기와 일본군의 만행 등을 생생한 필치로 전하는 매킨지의 기사는 영국 신문(데일리 메일)에 실리지 못했다. 매킨지는 다른 창구를 찾았다. 항일의 기치를 세우며 투쟁한 어니스트 베델(1872~1909)의 대한매일신보였다.
“한국의 내륙을 목격하고 귀국한 사람의 목격담인데…‘어느 날 저녁 의병 10명을 만났다…의병들은 민족을 구하지 않으면 중도에 죽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일본인들은 약탈하고 능욕하고 살인하고 있었다. 이 강도만도 못한 무리를…. 그들은 왜 그렇게 악하고 미친듯한 정책을 실시하는가….”(대한매일신보 영문판 ‘코리아데일리뉴스’ 1907년 9월24일)
이 기사에 등장하는 ‘한국의 내륙 상황을 전한 사람’이 바로 ‘매킨지’이다. 그것에 만족할 매킨지가 아니었다.
그때의 생생 취재기를 담은 <한국의 비극(Tragedy of Korea)>(1908)을 펴냈다. 유명한 의병 사진은 그 책에 실은 것이다.
■친일파가 항일투사로
항일 투사로 변신한 매킨리는 1919년 3·1운동사를 중심으로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1920년)을 발간한다.
그해(1920년) 10월에는 영국에서 친한단체인 한국친우회(Friends of Korea)가 발족을 주도한다.
영국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창립식에는 전현직 국회의원과 교육자, 언론인, 종교인, 귀족과 각계 인사 총 62명이 참석했다. 창립식에서는 일제의 식민정책을 비판하면서 한국의 실상을 널리 알리고 한국인의 자유 회복을 위한 지원 등을 결의했다. 매킨지는 ‘한국친우회’의 간사로 활약했다.
이후에도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며 언론활동을 벌이던 매킨지는 1931년 네덜란드 제이스트에서 타계했다. 매킨지는 1908년 <대한제국의 비극>을 쓰면서 소름끼치는 예언을 했다.
“일본에서 군부가 독재하면…만주를 침략하고 중국에까지 확대되어 끝내는 커다란 분쟁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매킨지는 “나는 ‘군국주의파가 일본 정책을 장악하고 있다’고 본다. 이 주장을 ‘반일적’이라 한다면 나는 기꺼이 반일의 피고가 되겠다”고 했다. 그 예언은 20여년 뒤 현실로 다가왔다. 매킨지의 또다른 한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이 민족(한국인)에게 기회만 주어지면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보여줄 것이다.”(<한국의 독립운동>·1920)
제2, 제3의 친일파가 곳곳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다. 매킨지 같은 분 보기에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매킨지의 사진이 담긴 그 의병들의 눈도 바라보기도 두렵다. (이 기사를 위해 김상기 충남대 명예교수, 박민영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강혜승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유통조사부장, 정나리 토지주택박물관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김상기, ‘한말 일제의 침략과 의병 학살’, <역사와 담론> 52, 호서사학회, 2009
박민영, <대한제국기 의병연구>, 한울, 1998
심철기, ‘<대한제국의 비극>에 나타난 1907년 의병전쟁과 의병’, <한국민족사연구> 103권, 한국민족사학회, 2020
홍순권, ‘한말 일본군의 의병 진압과 의병 전술의 변화 과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5권45호,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3
토지주택박물관 편, <보병 제14연대 진중일지>(ⅠⅡⅢ), 20
조선주차군사령부 편, <조선폭도토벌지>, 1913
김순덕, ‘경기지방 의병운동 연구’(1904~1911), 한양대 박사논문, 2002
조동걸, <한말의병연구>, 독립운동사교양총서2, 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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