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살 성인에게 1억4천만원을 준다면?…피케티의 ’최소 상속제’ 제안
자산 불평등 개선 위한 보편 상속제 구상
‘25살 되는 대한민국 성인에게 1억4천만원을 지급하자’.
다소 황당한 주장처럼 들리지만, 경제학자이자 세계 최고 불평등 연구자인 토마 피케티 파리 경제대 교수 제안의 ‘한국판’이다.
지난 3일 연세대 한국불평등연구랩(소장 유종성 교수)이 ‘한국의 불평등과 사회정책’을 주제로 연 국제학술회의에서 온라인으로 참석한 피케티 교수는 ‘최소 상속제’(Minimal Inheritance)를 제안했다. ‘모두를 위한 상속제’로도 불리는 그의 최소 상속제 개념은 단순하다. 한 나라 전체 성인 평균 순자산(부채를 뺀 자산)의 60%를 일정한 나이의 모든 성인에게 나눠주자는 것이다.
왜 이런 제안을 했을까? 선진국은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들보다 대체로 소득이나 자산 불평등도가 낮다. 하지만 선진국에서조차 자산 불평등은 심각하다. 예를 들어서 프랑스에서 순자산의 크기에 따라 줄 세웠을 때 하위 50%가 전체 순자산에서 차지하는 몫은 6%에 불과하다. 서유럽으로 넓혀 보더라도 그 비율은 4~5% 수준이다. 반면 상위 10%의 몫은 50%가 넘는다.
그는 “이건 단지 돈의 문제만이 아니다. 기회의 문제이자 한 사회 내 (이들의) 협상력의 문제”라며 “하위 50%가 사업을 시작하거나 집을 살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상속을 받는다면 경제적 (계층) 이동성을 높이고 경제적 기회가 (보다 균등하게) 제공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소 상속제를 시행한다면, 프랑스를 포함한 서유럽의 경우 25살 이상 성인 1인에게 약 12만유로(약 1억8천만원)가 주어진다. 이 지역 성인 평균 자산 약 20만 유로의 60%에 이르는 돈이다. 우리나라에 적용해보면 지난해 가구당 평균 순자산(4억3540만원, 가계금융복지조사 기준)을 평균 가구원 수 및 성인 수 등을 고려해 계산했을 때 대략 1억4천만원 정도다.
피케티는 이 정도 최소 상속액을 주지 않으면 장기적 부의 분배에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봤다. 유럽에서 실제 전체 자산에서 하위 50% 비중이 불평등이 극심했던 1차 세계대전 이전 1~2%에서, 불평등이 크게 개선됐다고 하는 지금에도 5~6% 수준으로 커다란 질적 변화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유럽에서 피케티가 제안한 최소 상속제를 하게 되면 하위 50%의 순자산 비중이 5% 안팎에서 30%대 중반으로 높아질 것으로 예상됐다. 중상위 40%의 몫도 조금 늘어나지만, 상위 10%의 몫은 50%대 중반에서 20%대 아래로 떨어진다.
3년 전 그는 프랑스 언론 르몽드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한 푼도 상속받지 못한 사람은 12만 유로를, 100만 유로를 상속받은 사람은 세금 등을 제하고 60만 유로를 받을 수 있다고 예시하기도 했다. 모두 일종의 상속을 받게 한다는 점에서 ‘보편적 상속’ 제도라고도 한다.
물론 단기간 실현을 전제로 한 제안은 아니다. 그는 “지속해서 복지국가와 교육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기본 소득’(Basic Income)을 도입하는 것과 함께 상속의 재분배가 필요하다”면서 “당장 내년에 실행하자는 게 아니라 20세기 복지국가가 발달해온 것처럼 21세기 전반에 걸쳐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914년부터 1980년까지를 불평등이 크게 줄어든 ‘대규모 재분배’ 시기라고 구분한 뒤, 복지국가의 부상을 그 핵심으로 본다. 복지국가가 해왔던 이 같은 역할을, 앞으로 최소 상속제가 대신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피케티는 이날 온라인 강연에서 자신이 쓴 ‘평등의 짧은 역사’를 중심으로 풀어갔다. ‘21세기 자본’과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압축판인 이 책은 3년 전 프랑스어판으로 처음 나온 뒤 이듬해 영어로 그리고 지난달 한국어로 번역됐다.
최소 상속제는 꽤 구체적인 아이디어다. 25살 이상 성인에게 1억원이 넘는 상당한 돈을 줘야 하는데, 피케티는 2년 전 미 버클리대의 가브리엘 주크만과 이매뉴얼 사에즈 교수와 함께 쓴 논문(자본 및 자산 과세에 대한 재고)에서 재원 조달 방식의 얼개도 내놨다. 그는 연간 소요 비용이 국민소득(GDP)의 약 5%에 이를 것으로 보고, 부유세(종부세나 재산세처럼 보유 자산에 매기는 세금)와 상속세(상속이나 증여를 통해 이전되는 재산에 매기는 세금)의 누진제 강화를 통해 충분히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봤다. 그가 추정한 최소 상속제 재원 규모는 현재 주요 선진국의 국민소득 대비 공교육비 수준이다.
최소 상속제 바탕에 깔린 정신은 피케티의 ‘정의론’이기도 하다. 그는 몇 년 전 국제정치사회(IPS) 저널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산의 불평등은 삶의 기회에서 커다란 불평등을 만들어낸다. 어떤 사람은 평생 임대료를 내고, 어떤 사람은 평생 임대료를 받는다. 어떤 사람은 회사를 세우거나 가족 회사를 물려받지만 어떤 사람은 회사를 만들 작은 종잣돈조차 결코 갖지 못한 채 산다. 우리 사회의 부의 분배가 극단적으로 집중돼 있다는 걸 깨닫는 게 중요하다.”
종합소득세, 상속세 등 부자의 세 부담을 덜어주기 바쁜 윤석열 정부는 지금 피케티의 제안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 방향은 결국 자산 불평등을 더욱 키우는 쪽이다.
류이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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