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영의 Energy 지정학] 제 꾀에 넘어간 곰… 러시아의 에너지 전략이 흔들린다

최준영·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2024. 9. 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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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카포트냐 정유공장. 지난 1일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화재가 발생했다. /타스 연합뉴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나라다. 그 거대한 땅 아래에는 막대한 에너지 자원이 매장돼 있다. 2023년을 기준으로 러시아는 일일 원유 생산량 1000만 배럴로 세계 2위, 천연가스 생산량도 586억㎥로 세계 2위다. 석탄도 연간 4억2000만t을 생산하면서 세계 6위를 점하고 있다.

러시아는 에너지 자원을 세계시장에 수출하면서 국가 경제를 운영해 왔다. 2021년 러시아 최대의 수출 상품은 원유이고 2위는 천연가스, 3위는 석탄이라는 점은 러시아가 에너지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국가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러시아는 핵무기를 보유할 뿐 중동국가들과 비슷한 체제이다.

그래픽=김하경

러시아의 석유산업은 19세기에 카스피해 인근에 있는 현재의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시작됐다. 19세기 후반 조명용 등유 수요가 확대되면서 이뤄진 대규모 투자를 통해 발전하였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등장한 소련은 풍부한 석유에 의존해 경제를 발전시켰고,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석유자원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경제의 효율성을 향상시킬 필요성을 저해시켰다. 1980년대 중반에는 국제 유가가 폭락하면서 큰 타격을 가져와 결국 소련 몰락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풍부한 러시아의 에너지 자원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막대한 전비를 부담하면서도 전쟁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각종 제재는 점차 러시아를 어렵게 하고 있다. 석유 및 가스에 부과되는 세금은 2021년 전체 국가 예산 세입의 35.6%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 비율이 2023년에는 30.9%로 감소했다. 각종 제재 조치로 인한 수출량 감소와 수출 가격 하락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에너지 자원 가운데 큰 타격을 입고 있는 것은 천연가스다. 2022~23년 겨울을 앞두고 EU(유럽연합) 내부의 갈등과 혼란을 유발하기 위해 러시아는 EU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을 대폭 줄였다. 하지만 EU가 대체 공급지 확보에 성공하면서 러시아는 최대 가스 판매 시장인 EU에서의 점유율을 상당 부분 잃었다. 2023년 러시아의 가스 독점 기업인 가스프롬은 69억달러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유럽으로 가는 수출량이 2022년의 639억㎥에서 2023년 55% 급감한 283억㎥에 그친 데 따른 타격이 결정적이었다.

러시아로서는 EU에서 감소한 천연가스 수요를 다른 지역에서 메워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곤란하다. 러시아는 유럽으로 판매가 감소한 356억㎥만큼을 중국이 대신 사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중국은 러시아산 천연가스 구매량을 늘리기보다는 구매 가격을 낮추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23~2024년 중국에 공급된 러시아 가스는 백만영국열량단위(mmBtu)당 6.4~6.6달러에 공급되었는데 이는 2023년 유럽에 대한 판매 가격 12.9달러와 비교해보면 절반 수준에 불과한 것이었다. 투르크메니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국가로부터 추가 수입이 가능한 중국이 다급한 러시아의 상황을 이용하면서 가격을 후려치고 있는 것이다.

석유의 경우 천연가스보다는 괜찮지만 막대한 손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EU와 G7(주요 7국) 국가들의 제재로 인해 2022년 말부터 2023년 초반까지 러시아의 원유는 국제시세보다 30% 이상 낮은 가격으로 거래됐다. 이후 인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국가에 대한 수출을 늘리고 있다. 그러나 주요 러시아 항만으로부터 먼 곳에 위치한 특성으로 인해 배럴당 10~15달러의 추가적인 운송비를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러시아의 원유 판매 수익성은 크게 낮아졌다. 여기에 더해 배럴당 60달러로 정해져 있는 제재 기준을 회피하기 위해 서류상 가격을 낮춰야 한 것도 타격이었다. 이로 인해 수출 가격을 기준으로 부과되는 세금의 액수도 감소하면서 재정 당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물론 러시아는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다. 파이프라인을 대신해 LNG(액화천연가스) 수출을 늘리는 것이 대표적이다. 2023년 EU로 수출된 러시아산 LNG는 2021년에 비해 38% 증가했다. EU에 LNG를 많이 공급하는 국가 순위로 러시아는 미국에 이어 2위에 올라섰다.

파이프라인을 통한 EU 우회 수출을 위해 튀르키예와 협력하는 방안도 논의했다. 파이프라인으로 공급되는 아제르바이잔과 이란산 천연가스와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튀르키예에서 혼합해 원산지를 세탁하는 방식으로 제재를 피해 EU에 공급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LNG의 경우 생산설비 상당수를 서방 기업에 의존하고 있어 생산량 확대가 곤란하다. 튀르키예와의 협력 역시 양국의 주도권 갈등으로 인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에너지 자원 생산에 필요한 핵심 설비와 소프트웨어 대부분을 서방 기업에 의존하던 러시아는 서방 기업들이 떠난 자리를 중국 기업과의 협력으로 메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근 북극권에 위치한 LNG 생산설비가 중국 상하이 인근에서 제작돼 이동하는 모습이 관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국의 장비 및 기술은 기대와 달리 서방 기업에 비해 오히려 비쌀 뿐만 아니라 신뢰성도 낮아 러시아 당국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러시아는 대규모 에너지 자원을 수입하는 중국, 인도 등이 러시아에 대규모 투자를 통해 기술개발을 위한 재원 확충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들 국가의 기업들은 미국의 제재 대상이 될까 두려워 러시아에 대한 투자를 유보하거나 축소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가 러시아의 다급한 상황을 이용하여 최대한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의 에너지 자원만을 수입하는 모습은 냉정한 국제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막대한 러시아의 에너지 자원은 EU를 비롯한 주변 국가에 대해 러시아의 전략적 레버리지를 강화시키는 자산으로 작용해왔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레버리지를 상실하고 있는 것은 큰 전략적 실패라 할 수 있다. 단순한 에너지 보유량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고 이용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러시아는 보여주고 있다.

‘에너지 대국’ 러시아의 1등 공신은 노벨 가문

러시아의 석유 개발은 노벨상을 만든 위인으로 기억되는 알프레드 노벨과 그의 형제들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지금은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인 카스피해 연안의 바쿠는 마르코 폴로가 ‘먹을 물은 없고 사람들은 연못에서 불을 긷는다’고 적었을 만큼 오래전부터 석유와 가스가 분출하는 지역이었다. 노벨 형제 가운데 큰형인 로베르트는 석유의 매력에 빠져 유전을 인수했다. 둘째인 루드비그가 러시아군에 납품할 소총의 개머리판 제작을 위해 숲을 매입하라고 준 돈으로 이런 투자를 했다.

1876년 바쿠에서 생산된 석유가 당시 러시아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루드비그는 미국에서 전량 수입하던 조명용 등유를 대체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루드비그는 노벨형제석유사(브라노벨)를 설립했다. 또한 미국의 엔지니어들을 초청해 과학적 탐사와 석유정제 기술을 발전시켰고, 세계 최초의 유조선을 제작하는 등 발명가로서의 자질을 발휘했다.

루드비그의 전략이 적중하면서 러시아는 1884년 연간 100만 배럴의 석유를 생산하며 미국 생산량의 3분의 1 수준까지 추격하게 됐다. 1889년에는 미국을 추월해 세계 최대의 석유생산 국가가 됐다.

러시아 석유산업의 성장을 지켜본 로스차일드와 스탠더드오일도 바쿠에 진출했고, 자본을 앞세워 브라노벨을 자신들에게 매각하도록 압박했다. 루드비그 노벨은 석유운반 파이프라인 건설을 통해 운송 비용을 낮춰 유럽시장에서의 점유율을 끌어올리면서 맞섰다.

이 과정에서 동생 알프레드 노벨이 개발한 다이너마이트가 대량으로 사용됐다. 1920년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바쿠가 적군에 점령되자 노벨 가문은 라이벌인 스탠더드오일에 지분의 절반을 매각하고 철수했다. 이렇게 해서 노벨 가문과 러시아의 인연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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