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질학계 저항에 불발됐지만…‘인류세’ 공인은 시간문제”

한겨레 2024. 9. 4.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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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거부’ 이후, 연구 최전선 학자들 대담
제4기 층서위 부위원장 마틴 헤드
“토론 무시하고, 부결 맞춰 진행…과학적 검토 없었다”
인류세실무단(AWG)이 인류세의 대표 지층으로 선정한 캐나다 크로퍼드 호수. 수심은 깊은 데 견줘 면적이 작아 퇴적층이 잘 보존돼 있다. 하지만 지난 3월 국제층서위원회 산하 소위원회는 인류세를 지구 지질연대표의 새로운 지질시대로 넣어야 한다는 인류세실무단의 제안을 12 대 4의 투표 결과로 기각했다. 사우샘프턴대 제공

“인간이 만든 지질시대를 선언하기엔 이르다고 지질학자들이 결정했다.”

지난 3월6일 뉴욕타임스 1면 단독기사는 인류세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충격이었다. 지질학계는 물론 인문사회과학, 예술계에서도 관련 연구와 활동이 펼쳐지는 와중이었기 때문에, 인류세가 지질학계에서 단박에 거부된 것은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인류세는 인간의 영향으로 지구의 물리·화학적 시스템이 바뀌면서 지구가 홀로세의 평형을 벗어나 새로운 지질시대에 진입했다는 주장이다. 인류세는 국제지질과학연맹 산하 제4기 층서소위원회(SQS)와 국제층서위원회(ICS)에서 차례로 투표를 거친 뒤, 지난달 31일 막을 내린 ‘2024 부산 세계지질과학총회’에서 최종 비준·공포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난 3월 ‘인류세실무단’(AWG)이 제출한 공인안이 첫 단계인 제4기위원회에서 부결됨으로써, 2009년 실무단 출범 이후 15년 가까이 이어진 인류세 공인 노력도 물거품이 됐다.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가 지난 2~3일 연 ‘제2차 인류세 연구 국제심포지엄’ 참석차 방한한 마틴 헤드 캐나다 브록대 교수(지질학)는 “학계 상층부의 특정인에 의해 (지질학계의 보수적) 이데올로기가 투표 전 과정을 지배했다”며 “투표 기한을 한달로 제한하고 과학적인 토론도 제대로 하지 않는 등 규정을 위반했다”고 지질학계를 직격했다. 헤드 교수는 투표가 진행된 제4기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당사자가 구체적인 과정을 언론에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음은 지난 2일 카이스트에서 이뤄진 헤드 교수와 위르겐 렌 ‘막스플랑크 지질인류학연구소’ 소장, 박범순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장 등 인류세 연구의 최전선에 선 학자들의 대담 전문이다.

지난 2일 대전시 카이스트에서 만난 박범순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장(왼쪽부터), 위르겐 렌 막스플랑크 지질인류학연구소장, 마틴 헤드 브록대 교수.

박범순(이하 박) 인류세 공인 투표는 어떻게 진행됐나?

마틴 헤드(이하 헤드) 지난해 10월31일, 1952년을 시점으로 하는 인류세를 새로운 지질시대로 공식화하는 최종 제안서를 인류세실무단이 제4기위원회에 제출했다. 국제층서위원회 규정에 따르면, 어떤 제안서든 자연스럽게 결론 날 때까지 토론이 진행돼야 한다. 기한도 규정돼 있지 않다. 대개 실무단에서 만든 안이 논쟁적이지 않으면 한달 정도 토론한다. 하지만 인류세 공인안은 달랐다. 제4기위원회에서도 찬성과 반대 입장을 가진 사람이 있어, 깊고 넓은 토론이 이뤄져야 했다. 인류세는 복잡한 단면을 갖고 있다. 기후변화는 물론 기후정책, 사회과학, 인문학과 관련된다. 누가 지질시대를 결정하느냐, 어떤 집단에 이익이 되나 등 모든 이슈를 대상으로 토론해야 했지만, 인류세가 부결되길 원했던 사람들은 토론을 최소화하려 했다.

남종영(이하 남) 초기 단계부터 의견 충돌이 있었던 건가?

헤드 한달 만에 투표해 결론 내리라고 밀어붙인 이가 국제층서위의 고위 임원이다(그는 이후 심포지엄 발표에서 인류세 반대를 주도한 인물로 스탠 피니 국제지질학연맹(IUGS) 사무총장과 필 기버드 국제층서위 사무총장을 거론했다). 그는 제4기위원장인 얀 잘라시에비치와 부위원장인 나를 ‘이해충돌이 있다’면서 심의 절차에서 제외하고(둘은 인류세 연구자다), 다른 부위원장인 저우리핑 베이징대 교수에게 진행을 맡겼다. 우리는 한달 제한이 규정에 어긋나고 긴 시간의 토론이 필요하다고 항의했다. 다른 위원들도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과학 포럼의 장은 열리지 않았다. 결국 투표 결과는 이데올로기적인 반대로 귀결됐다. (인류세 제안에 대해 반대가 12표, 찬성이 4표였다.)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헤드 층서학자들은 최소 수천년에서 수백만년의 시간 단위를 다룬다. 지질학계 위원들은 ‘72년은 너무 짧다’는 ‘학문적 본능’에 따라 투표하고 말았다. 층서학계 바깥에서 제기된 담론을 받아들여 조율하고 수정할 기회가 없었다.

위르겐 렌(이하 렌) 인류세 부결 과정에 과학적인 합리화가 없었던 점이 흥미롭다. 과학적 노력이 한순간에 한 집단의 정치에 의해 사라져야 한다니….

지난 2일 대전시 카이스트에서 위르겐 렌 막스플랑크 지질인류학연구소장(왼쪽부터), 마틴 헤드 브록대 교수, 박범순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장이 인류세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헤드 저우 부위원장이 상층의 의견을 따랐을 것으로 의심한다. 그들은 부산 지질과학총회 이전에 인류세 공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헤드는 “전통적인 층서학자로 훈련받은 사람은 인류세를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인류세 부결과 조직의 이익과 영향력이 관계없다고 할 수 있나? 그저 보수적인 층서학자들이 개인적 권위를 지키다 나온 결과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문제인가?

헤드 (그들이) 뒤에서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는 있겠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인류세가 지질시대가 아니라 ‘사건’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지구에 중대한 인간 영향을 준 사건이라는 것인데, 중대한 것이 무엇인지, 인간 영향이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기 때문에 텅 빈 개념이다. 인류세 개념을 모호하게 하려고 한 것 아닌가 싶다. 나는 인류세 제안을 깎아내리려는 무대 뒤편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본다.

인류세실무단은 다시 인류세 제안서를 내나?

헤드 열린 자세로 평가받고 이데올로기적인 반대가 없을 때 제출하지 않겠나. 결국 인류세는 공인될 것이다. 시기의 문제다.

인류세는 인간이 지구 시스템의 일부, 즉 지질학적 요인이 되었다는 사고를 하게 해준다. 인류세 개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인류세는 지질학에 뿌리를 두었지만, 다양한 학문으로 뻗어나갔다. 하지만 그런 여러 학문을 횡단하는 학제 간 연구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토머스 쿤은 지배적인 패러다임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하다가 결국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면서 과학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헤드 교수가 말한 이데올로기는 쿤의 패러다임 전환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류세에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과학, 역사학, 인문학, 사회과학이 필요하다.

우리는 더는 같은 행성에 거주하지 않는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매우 어렵고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거기에 인류세를 헤쳐 나가는 캠프를 차릴 수 있다.

대전/글·사진 남종영 환경논픽션 작가·기후변화와동물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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