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짐작의 힘
상대의 낯빛을 살핀다. 밝은지 어두운지, 밝음과 어두움이 혼재되어 있는지. 사람의 몸에 빛과 그림자가 수시로 통과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말문을 여는 것이다. 상대가 말할 때 함께 나오는 기운을 헤아린다. 그것이 뿜어져 나오는지, 새어 나오는지 파악한다. 뿜어져 나올 때면 들뜸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새어 나올 때면 어떻게 기운을 북돋울 수 있을지 고민한다. 자신이 먼저 에너지를 발산함으로써 상대의 그것을 끌어올릴 수도 있고, 완만한 상승을 노리고 말에 말을 차근차근 보탤 수도 있을 것이다. 친구가 알려준 ‘처음’의 비법이다.
“처음이라니? 첫 만남에만 가능하다는 거야?” 친구가 답한다. “아니, 모든 만남의 첫 순간에 해당해. 설사 상대를 어제도 만났더라도.” 혹시 오늘의 만남도 그에게는 살피는 일이었을까. 그가 피곤하진 않을지 못내 걱정된다. “매번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만나면 힘들지 않아?” 그는 둘 이상의 사람이 모여 ‘함께’의 상태가 되면, 누구든 상대를 아예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다고 했다. “밥을 예로 들어볼까. 혼자일 땐 내가 먹고 싶은 걸 먹거나 대충 때우게 되잖아. 상대가 있으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게 뭔지 따지게 되지. 함께 먹어야 하니까. 나는 그 일을 처음부터 하는 거야. 만남의 첫 순간부터.”
그는 만나는 사람을 진심으로 대한다. 처음 만났든, 여러 번 만났든 만남에는 늘 첫 순간이 있다. 그 순간부터 상대를 조용히 관찰하는 것이다.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받는 이는 충분히 배려받고 있다고 느끼게끔 한다. 이 태도는 갈등이 불거지지 않게 하는 신중함, 상처가 생길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는 섬세함, 섭섭함이 노여움이 되지 않게 하는 치밀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가만가만’이야.” 그는 가만히 힘주어 말한다. 그의 말처럼 한 발짝 떨어져 있을 적에만 보이는 게 있다. 누구나 등잔 밑이 어두운 건 알고 있지만, 등잔을 직접 들어 확인하고 내친김에 그것이 놓인 자리를 닦지는 않는다.
“너는 짐작하는 사람이로구나.” 내 말에 그가 환히 웃는다. 대화의 물꼬로 맑은 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집에 오는 길에 짐작을 찾아보았다. 짐작을 짐작하는 데서 그치는 대신, 짐작이 뭔지 제대로 알기 위해서다. ‘짐작할 짐(斟)’과 ‘술 부을 작(酌)’으로 이루어진 짐작은, 넘치지 않게 따르려면 신중해야 함을 시사한다. 대작(對酌)할 때 이 정도면 충분할지, 조금 천천히 따를지 생각하는 일은 대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말이 과하면 소란이 되고 일방적으로 주도되는 대화는 공허한 웅변과 다를 바 없다. 짐이 ‘술 따를 짐(斟)’이기도 하다는 것은 짐작이 ‘따르고 붓는 일’임을 상기시킨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는 일이 바로 짐작이다.
짐작하며 살피는 사람, 미루어 생각하며 헤아리는 사람, 대화의 물꼬가 트이는 데 시간이 걸려도 한 번 트인 물꼬가 저 멀리까지 연결될 수 있도록 수를 쓰는 사람, 그럴 ‘수’밖에 없음을 뾰족한 ‘수’로 만드는 사람, 그리하여 의존명사였던 ‘수’를 명사의 자리로 바꾸어놓는 사람이 다름 아닌 그였다. 짐작은 겉으로 보기엔 고요하지만, 짐작하는 사람의 마음속은 시종일관 법석인다. 짐작할 때 취하게 되는 가만가만함은 그 어떤 일도 고만고만하게 취급하지 않게 한다. 짐작은 따르고 부어 바닥을 표면으로 드러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짐작은 ‘두루’와 친하다. 상대를 궁금해하는 데서 짐작은 시작되고, 그 궁금함은 애정 어린 질문으로 연결된다. 짐작이 멀리해야 할 단어는 ‘지레’다. 오죽하면 성급한 짐작을 일컫는 ‘지레짐작’이란 단어가 생겼겠는가.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말끔한 복장이 완성되지 않듯, 첫 순간마다 첫말을 잘 건네고 첫 표정을 잘 지어야겠다. 그럴 때 짐작의 끝에 비로소 이해가 찾아올 것이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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