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리 달리기, 인류가 최상위 포식자 된 이유

한겨레21 2024. 9. 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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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방지의 새벽을 달리다]인류와 다른 동물을 가르는 큰 차이, 멈추지 않고 꾸준히 달릴 수 있는 능력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몬주익 올림픽 경기장 앞에 조성된 황영조 기념비. 신동호 제공

마지막 나무의 가지 하나가 뜨거운 한낮으로 부서진다. 메뚜기떼처럼, 건조한 바람이 사바나의 수분을 모조리 데려간다. 눈물을 잃고, 마지막 열매는 울지 못한다. 마른 풀이 지평선 너머까지 일렁이는데, 그 위에서 태양이 신나게 춤춘다. 루시(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발바닥에 전해지는 땅의 열기가 당혹스럽다. 펄쩍펄쩍, 태양을 따라 춤춘다. 그녀가 나무에서 내려온 어느 정오였다.

처음엔 나무를 찾아 허리를 곧추세운다. 네 발로 걷다가 다시 일어서 두리번거린다. 하늘이 온통 머리 위에 내려앉아 있다. 무겁다. 머리를 오래 들고 있을 수 없다. 풀을 씹어보지만 공복 속으로 허기가 뛰어든다. 허기가 며칠 전 주워 먹었던 영양의 살점을 기억나게 한다. 이번엔 영양을 찾아 서본다. 쫓아 달려본다. 포기한다. 고개를 곧게 세우고 아픔을 참는다. 죽은 고기를 찾아 어슬렁거려본다. 곁에는 하이에나 무리가 으르렁거린다. 독수리들이 먼저 도착해 뼈까지 가루로 만들어버린다. 죽은 고기는 아주 드문 행운일 뿐이다. 영양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해지길 바라지 않았을 리 없다.

오래 달리자 유능한 사냥꾼이 됐다

200만 년이 지난 어느 날, 루시가 사내아이를 낳는다. 좀 엉성하다. 마르고 힘도 없다. 네 다리의 아이들보다 빠르지도 않다. 나무에 오래 매달리지도 못한다. 여자아이들에게 인기도 없다. 그런데 발뒤꿈치의 근육이 용수철처럼 탄탄해져 있다. 루시에게 없던 아킬레스건이다. 녀석은 뜨겁게 달궈진 초원이 즐겁다. 태양이 하루를 마감하는 곳까지 천천히 달릴 수 있다. 엉덩이에는 대둔근이 있고 목덜미에도 근육이 있어 머리가 흔들리지 않는다. 달리는 동물, 개나 말에게만 있던 것들을 가져왔다. 고개를 들고 새들을 따라 종일 달린다.

녀석이 영양을 쫓는다. 맨손이다. 창을 손에 쥐려면 180만 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화살을 쏘려면 198만 년 뒤, 영리한 소녀가 태어나야 한다. 영양은 10㎞에서 15㎞ 정도 달리면 고체온증으로 쓰러진다. 빨리 달릴 필요가 없다. 아주 무더운 날을 골라 영양이 전력으로 도망치게 하면 된다. 고개를 높이 들어 눈앞에서 놓치지만 않으면 이내 따라잡을 수 있다. 오직 두 발만으로 영양의 고기를 얻는다. 영양이 피를 흘리지 않으니, 피 냄새를 맡고 찾아오는 불청객도 피할 수 있다. 태양 아래에서 10㎞를 달릴 수 있으면 된다. 창과 활이 없이 달리기만으로 아주 치명적인 사냥꾼이 될 수 있다.

2024 썸머 나이트 런 10㎞ 달리기에서 58분24초를 기록했다. 신동호 제공

‘2024 썸머 나이트 런’은 경기 하남시 미사리 조정경기장 주위 10㎞를 달리는 대회다. 여름밤을 달리겠다고, 1만 명의 러너가 모였다. 8월의 폭염 속 엄청난 인원이다. 달궈진 아스팔트와 사람들의 더운 숨결이 공기를 끓인다. 포플러나무도 땀을 흘린다. 저녁 바람이 서둘러 땀을 닦아주지만 하루 내 태양과 어울린 나뭇잎들은 푹 젖어 있다.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땀샘이 폭발한다. 태양이 남긴 더위는 도무지 하루를 끝내려 하지 않는다. 간신히 자리를 잡아 달리기 시작한다. 젊은 숨소리가 훅훅, 나이 든 숨소리가 후후,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리를 바꿔가며 영양을 뒤쫓는다. 오래된 초원의 기억이 땀샘에서 솟아난다. 운동화 밑창을 뚫고 사바나의 열기가 전해진다.

루시의 아들은 장거리 달리기를 위해 태어난 것이다. 녀석은 허기를 인내심으로 견딘다. 인내심은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게 한다. 덕분에 태양이 송곳처럼 녀석의 피부에 수백만 개의 땀샘을 뚫었다. 다른 동물들은 폐로만 체온을 조절한다. 체온이 40도에 이른 치타는 혀를 내밀고 숨을 헐떡인다. 순간 속도는 사냥의 성공을 보장하지만, 실패 이후 곧 다시 달리기 어렵다. 그런데 녀석은 효율적인 공랭식 엔진을 장착했다. 땀이 체온을 데리고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달리면서 몸을 식히고, 계속 달린다.

달리도록 진화한 인간의 신체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 이정표. 신동호 제공

녀석은 힘들면 숨을 두세 번 연속 내쉰다. 산소가 지친 근육을 얼른 찾아간다. 양서류는 달리는 동안 숨을 쉬지 못한다. 숨을 쉬기 위해서는 멈춰야 한다. 네발 동물은 몸을 굽혔다가 펼 때 한 번, 한 걸음마다 한 번씩밖에 숨을 들이쉬지 못한다. 필요한 산소가 제때 근육에 다다르지 못한다. 녀석은 뭔가 잘못된 듯 보인다. 두 발로 달리면서 공기 저항과 맞닥뜨리고, 순간 속도를 잃는다. 그렇지만 서서, 흉곽을 부풀리면서 지구상 가장 많은 공기를 흡입할 수 있는 동물이 된다. 쉬면서, 회복하면서 계속 달린다.

나이트 런 7㎞ 지점에서 포기하고 싶어진다. 발걸음을 종종걸음으로 바꾼다. 힘이 좀 절약된다. 하늘에서 머리를 잡아당기는 느낌으로 몸을 쭉 편다. 가슴이, 폐가 더 넓어졌을 것이다. 숨 쉬기가 좀 편해진다. 누구에게 배운 건 아니다. 여름날 달리기가 자연스럽게 가르쳐줬다.

여기저기 응급대원들이 분주하다. 쓰러진 러너들이 보인다.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녀석처럼 무리 가운데 장거리를 달릴 수 있는 또래들이 생겨났다. 녀석이 나이가 들었을 때 젊은 달리기 사냥꾼이 자라났다. 한 사냥꾼이 지쳐서 더 달리지 못할 때, 다음 러너가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달린다.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도망쳐 달리고, 먹이를 찾아 달리는 것, 함께 모여 달리는 것밖에 가진 게 없었다. 나이트 런 행사에 안타까운 사고가 있어 마음 한편이 불편하다. 그렇지만 여름밤에 1만 명이 모여 달린다는 것은 달리기가 우리가 가진 가장 본능적인 행위라는 것 말고는 잘 설명이 안 된다.

우리는 부실하게 태어난 녀석의 후손이다. 녀석처럼 마라토너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 속도와 힘을 포기하고 장거리 달리기를 선택했다. 네안데르탈인은 유능한 사냥꾼이었다. 강하고 똑똑했다. 온종일 달리는 우리를 보고 비웃었을지 모른다. 숲이 줄어들고 32도가 넘는 더위가 닥치기 전까지, 느리고 큰 동물들이 사라지기 전까지 말이다. 결국 잘 참고, 비쩍 말라 비실비실해 보이는 우리만 생존에 성공했다. 그렇게 남아 마라톤 42.195㎞를 달린다.

몬주익 언덕에서 본 바르셀로나는 아름다웠다. 신동호 제공

2021년 6월, 스페인 순방을 준비하며 마음이 설렌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그가 몬주익 언덕을 오르던 모습이 벅찬 감동으로 살아온다. 6월17일 새벽, 몬주익 언덕에서 바르셀로나가 어둠 속에서 깨어나는 모습을 봤다. 올림픽 경기장 앞 황영조기념비에서, 태극기를 달고 달리는 우리의 모습을 봤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본 국적으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한이, 바르셀로나의 밤을 밀어내는 모습도 봤다. 무궁한 달리기의 세월, 마라톤 완주 3~4시간이 영양을 쫓아 지쳐 쓰러지게 만든 시간과 같음에 소름이 끼친다. 장거리 달리기 사냥꾼이 결국 돈키호테를 쓰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만들어낸 사실에 놀란다.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가 달린 언덕

과학철학 시간이었다. 루이스 리벤버그는 인간이 논리, 유머, 추리, 예술 같은 복잡한 사고의 도약을 어떻게 이뤘는지 궁금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던 그는 그것을 찾아 부시먼들과 4년 동안 생활했다. 똑같이 먹고, 함께 달렸다. 남아프리카 사막에서 동물을 추적하는 기술이 그 기원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부시먼들은 우기에 영양의 몸이 빨리 과열된다는 것을 안다. 젖은 모래 때문에 발굽이 바깥으로 벌어진다. 보름달이 뜨면 밤새 활동한 영양이 새벽에 지쳐 있다는 것도 안다. 얼룩말의 똥 무더기를 보고 어느 똥이 어느 얼룩말의 것인지 구별한다. 정확히 한 마리를 쫓아갈 수 있다. 다른 무리와 섞이려 하면 떼어놓고, 쉬려 하면 달려들어 도망가게 한다. 그렇게 똥과 똥이라는 점을 머릿속의 선으로 연결할 수 있는 시각화, 추상적 사고가 생겨났을 것이다. 장거리를 달리려면 자신의 상태 또한 자주 돌아봐야 한다. 그렇게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예측하는 사고, 미래를 설계하는 능력이 쌓였을 것이다.

어느 날 노을 앞의 한 호모 사피엔스를 생각한다. 노을은 이마 위에 번져 있다가 슬그머니 가슴으로 내려와 아련함으로 물들인다. 영양을 쫓아간 이들이 궁금하다. 태양이 저리 사라져가는데, 우리가 그 끝을 피해갈 수 있을까. 아직 뜨거운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린다. 얼굴이다. 우우, 소리를 내본다. 음악이다. 가슴 어디 한쪽이 찡하다. 뭔가 마음이, 인간성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멀리서 먼지가 인다. 탁탁, 타닥닥, 무리가 영양을 둘러업고 달려오고 있다. 노을이 그 뒤에서 안도감을 남기며 사위어간다. 내일은 내가 달릴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새벽, 몬주익 언덕을 달린 루트. 신동호 제공

중랑천에 갈 때마다 이상하게 단출한 차림의 러너가 부럽다. 근사한 사이클로 출퇴근할 때, 장비를 갖춘 등반 후에도 달리는 꿈을 꾼다. 조금 달려보다가, 이건 내가 할 게 아니다, 매번 포기했지만 결국 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만다. 여름내 지쳐 돌아왔다가도 다음날 또 운동화를 신는다. 올림픽 마라톤 경기를 보며 루시가 낳은 사내아이를 떠올린다. 그런데 왜, 모두 달리지 않는 걸까. 집에 돌아갈 힘을 남겨놓고 싶기 때문일까.

인류를 인류이게 만든 단초

리벤버그는 인류의 집단적 상상력에 달리기가 깊이 관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언어도, 컴퓨터도, 우주선도, 또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도 달리기로 탄생했다고 여긴다. 달리기야말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 단초다. 더 좋은 우리가 되게 할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에게 이 능력이 있다.

글·사진 신동호 시인·전 대통령 연설비서관

*연재 소개: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58번의 순방으로 40개 나라를 방문했다. 신동호 시인은 연설비서관으로 참모 가운데 유일하게 모든 순방 일정을 보좌했고, 새벽 시간을 활용해 낯선 나라를 달렸다. 그때 보고 느낀 감정은 문 전 대통령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떠나며’ 시리즈에 고스란히 담기기도 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시인의 달리기에 대한 생각과 함께 묵혀놓았던 순방지의 새벽 이야기들을 4주마다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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