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내가 불러들인 도둑
굳이 과시하려 애쓰다가 비판을 자초하지 말아야
부남철 영산대 자유전공학부 명예교수
주역(周易)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길흉화복의 상황에 처하여 어떻게 하면 이롭고 후회와 허물이 없을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책이 주역이다. 그 본문은 추상적이고 난해하지만 이를 윤리 도덕의 관점에서 보충 설명한 정이천(程伊川, 1033~1107)의 역전(易傳)을 참고하며 읽으면 자기 발전에 지침이 되는 좋은 문장을 만날 수 있다. 필자는 이런 주역에서 특히 해괘(解卦)에 나오는 “도둑을 불러들이지 말라”는 취지의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도둑을 오게 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며 내가 그 원인을 제공했다는 말인데,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일관하는 정신이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주역에서 말하는 도둑이 노리는 대상이란 ‘합당한 자격은 없으면서 걸맞지 않게 높은 자리를 차지한 자, 윗사람에게는 소홀하면서 아랫사람을 학대하는 자, 물건 보관을 허술하게 하는 자, 용모를 과하게 꾸미는 자’라고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공자가 자세히 설명한 것이 있다. 남의 물건을 약탈하는 자를 지칭하면서 또한 분수에 넘치는 행위를 한 자에 대한 사회의 비판적인 여론과 적대적인 세력의 공격을 도둑이라는 말로 포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맹자에도 이와 같은 맥락의 시가 인용되어 있다. ‘창랑의 물이 맑거든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탁하면 내 발을 닦는다’(滄浪之水淸兮어든 可以濯我纓이요 滄浪之水濁兮어든 可以濯我足이라). 이 시에 대해서 혹자는 맑거나 흐린 그 상황에 맞게 대처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시의 바로 뒤에 인용된 공자의 설명을 보면 그 뜻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 수 있다. “제자들아, 저 노래를 들어봐라. 물이 맑으면 이에 갓끈을 씻고 물이 탁하면 이에 발을 닦는다고 하는구나. 물이 스스로 이렇게 다르게 사용되기를 자초한 것이다”(小子아 聽之하라 淸斯濯纓이요 濁斯濯足矣로소니 自取之也라하시니라). 이 문장에서 ‘자취(自取)’라는 말이 중요한데, ‘스스로 취하다’는 뜻이니 어떤 결과를 자기가 생기게 했다는 말이다. 물이 갓끈을 씻을 정도로 깨끗하니까 사람들이 그 물에 갓끈을 씻은 것이고 물이 더러우니까 사람들이 그 물에 발을 닦았다고 하는 것이다. 창랑가(滄浪歌)라고 하는 이 노래는 위와 같이 자기가 바르게 처신하면 사람들이 존경하고 그렇지 못하면 천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최근 각 분야에서 그 이름이 알려진 사람의 근황이 자주 언론에 보도되곤 한다. 그의 직업적인, 또는 예술적인 성취와는 상관없이 투자한 건물이나 고급 주택의 가격 상승을 사회에 알리는 오락을 겸하는 기사다. 이런 것이 대중의 관심사가 되고 뉴스가 될 정도로 들뜬 사회는 점점 더 외모와 물질을 중시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물론 예기치 않은 행운과 세속적인 성공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애쓴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면 그것을 향유할 당연한 자격이 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굳이 밖으로 드러내서 남에게 과시해야 하는가?
중용은 사회적으로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군자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한 책이고 ‘진실하게 거짓 없이 살아야 한다’는 뜻을 가진 ‘성(誠)’ 자를 중심 개념으로 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정신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군자가 견지해야 할 태도를 ‘계신공구(戒愼恐懼)’ 네 글자로 강조한다. 매사에 늘 경계하고 삼가며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임하라는 뜻이다. 현대인은 논어와 맹자를, 그리고 주역을 읽어서 삶의 지혜를 배우려고 한다. 그렇게 고전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좋은 말을 찾아서 교훈으로 삼고 또 한편으로 그 책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근본정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앞에서 소개한 주역 맹자 그리고 중용까지, 그 근저에는 ‘자기 자신’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자기 인격을 수양하는 공부를 하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가 선택한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기를 낮추어 늘 겸손하고, 남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것은 자기가 원인이고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자세가 그런 것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성찰과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군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 생활하는 모습을 간략하게 묘사한 시가 중용의 끝부분에 나온다. ‘(속에) 비단옷 입고 겉에 거친 홑옷을 걸친다’(衣錦尙絅). 군자는 본질적인 내면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과도하게 드러나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이다. 내면에 무엇인가가 들어있으면 겉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법인데, 굳이 과도하게 포장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반면 소인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갈망하기 때문에 겉이 번쩍이기를 원한다. 성공의 열매를 속에 감추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겉으로 조금씩 드러날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도둑을 초대할 것인가?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