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 인하 조건 충족" 이창용의 말은 그냥 말일까 선언일까
물가 목표 2%의 비밀 2편 말과 행동
중앙은행장 포워드가이던스
버냉키 “통화정책 98%가 말”
행동도 모호하게 하는 습성
금리인하 막는 두가지 변수
우리나라 8월 물가상승률이 물가 목표치인 2.0%까지 내려왔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10월 통화정책방향 결정회의에서 당연히 기준금리를 인하할까. 더스쿠프가 물가 목표치는 어떻게 산출됐고, 금리인하의 조건은 무엇이 있는지 '물가 목표 2%의 비밀 1‧2편'을 통해서 자세히 들여다봤다. 이번엔 2편 말과 행동이다.
우리는 1편에서 2%라는 물가 목표치가 뉴질랜드 재무부 장관의 TV 인터뷰에서 시작된 우연과 즉흥의 산물이었다는 점을 알아봤다. 미국이 오랜 기간 물가 목표를 공개하지 않다가 2012년에야 2%로 명시한 이유도 살폈다.
2편에서는 중앙은행장들이 어떻게 성명이나 기자회견에서 말을 이용해 포워드가이던스(미래 통화정책 방향 예고)를 구축하는지를 알아봤다. 한국은행의 10월 금리인하 가능성과 그 조건도 짚어본다.
■ 중앙은행장의 '말'=물가 목표치는 과학과 심리의 경계에 있다. 2라는 숫자가 비록 즉흥적인 발언에서 나온 결과물이지만, 그냥 나온 숫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가 예측은 사실상 신神의 영역이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1년 후 어떤 상품의 가격 변화를 어느 누가 예측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중앙은행장은 말을 무기로 사용해 대중의 인플레이션 기대치를 특정 수준으로 유도한다. 이른바 포워드가이던스를 통한 앵커링(anchoring‧정박효과)이다. [※참고: 앵커링은 행동경제학의 용어로, 협상 테이블에서 처음 언급된 조건에 얽매여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효과를 의미한다.]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의장은 2022년 연설에서 앵커링 효과를 "사람들이 (시장으로부터) 유입된 데이터에 상대적으로 둔감해진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은 2022년 5월 브루킹스연구소 행사에 참석해 자신의 신간 ⌜21세기 통화정책⌟을 언급하며 "통화정책의 98%는 말(talk)이고, 2%만 행동"이라고 털어놨다.
중앙은행장 직무의 98%인 포워드가이던스조차 구체적인 조건과 지침을 제공하는 '오디세이'식보다는 모호하게 방향성만 제시하는 '델포이'식이 더 많다.
■ 행동의 조심성=그렇다고 통화정책의 2%에 해당하는 '행동'이 구체적이라는 건 아니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은 단순히 기준금리를 올리거나 내리고, 시장에서 자산을 매도(양적긴축)하거나 매입(양적완화)하는 것만이 아니다.
여기엔 타이밍과의 싸움이란 가장 어려운 판단이 작용한다. 연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2020년 8월 물가 목표를 제시하면서 발표한 새로운 성명이 실마리를 줄 수 있다. 핵심은 "최대한 모호하게"다.
FOMC는 2012년 이후 물가가 2.0% 미만이었던 경우가 많았다고 인정하고, 물가가 목표치에 못 미치면 이후 상당 기간 2.0% 이상으로 적당히 상승시켜 장기 평균을 맞출 것이며, "연준이 생각하는 최대 고용 수준을 넘으면 (금리를 올려) 고용을 줄인다"는 내용을 폐지하고, 대신 "물가 통제에 필요한 경우에만 고용을 줄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쉽게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물가 목표 2.0%라는 숫자가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지 말라. 물가가 한동안 더 낮아진다고 따지지 말라. 물가 상승이 한동안 더 오래가도 따지지 말라. 긴축으로 고용을 줄이는 조건도 따지지 말라. 장기적으로 평균을 맞추고, 때가 되면 통제하겠다." 통화정책을 제시하는 '말'뿐만 아니라 '행동'도 모호하게 하겠다는 거다.
FOMC가 말뿐만 아니라 행동까지 조심하는 덴 나름의 이유가 있다. 사실 중앙은행은 물가 목표치를 쉽게 바꾸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나라가 3년이나 5년처럼 기간을 정해놓고 목표치를 재검토한다. 전망의 변화는 시장의 신뢰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다.
중앙은행이 시장의 신뢰를 잃으면 사람들의 1년 후 물가 예측인 기대인플레이션율에 큰 영향을 미치고, 이는 모든 경제주체의 행동에 영향을 줘 물가를 실제로 움직인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3년 10월 세계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기대 인플레이션이 1% 상승할 때마다 실제 물가상승률이 선진국에서는 0.8%포인트씩, 신흥국에서는 0.4%포인트씩 상승했다"고 분석했다.
이 때문에 물가상승률 2%란 즉흥적이면서도 선언적인 목표치보다 중요한 건 중앙은행장의 말이나 행동에 담긴 '의미'일지 모른다. 우리가 2%란 숫자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혹여 2%란 물가 목표를 달성했더라도 다른 변수가 수없이 많아서다.
■ 이창용의 말과 금리인하의 조건=이쯤에서 한국 이야기를 해보자. 한국은행 주요 인사들은 8월 물가상승률 연 2.0%라는 소식에 즉각 반응했다. 이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금융안정'을 언급했다. 10월 통화정책방향 결정회의를 앞두고 포워드가이던스가 작동된 것이다.
그 이유는 '부동산'에 있었다. 한은 주요 인사들은 물가 수준이 금리인하 조건을 충족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부동산 가격의 최근 재급등이 가계대출을 증가시켜 금융시장의 안정성에 빨간불이 들어왔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실제로 5대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8월 말 가계대출 잔액이 한 달 새 9조6259억원, 주택담보대출이 8조9115억원 증가하며 8년 만에 가장 큰 월간 증가 폭을 기록했다.
이창용 총재는 지난 3일 "물가 안정 측면에서는 기준금리 인하를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시기가 됐다"며 "금융안정 등을 봐서 어떻게 움직일지 적절한 타이밍을 생각해볼 때"라고 말했다. 신성환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은 "(부동산이) 이미 버블(거품)의 영역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는데, 집값이 소득 대비 올라가면 금융시장 안정을 상당히 저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웅 한은 부총재보는 지난 8월 2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6월 이후 서울 아파트 가격의 상승률은 연간으로 따지면 15% 수준"이라며 "집값 상승은 가계 대출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금융안정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 이들의 말은 어떠한 통화정책적 행동으로 이어질까. 방향성은 기준금리 인하가 맞다. 문제는 시점이다.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먼저, 미국 FOMC가 주장하는 장기 평균 균형이다. 고물가가 오래 이어진 만큼 기준금리를 내리지 않은 상황에서 저물가 국면이 오래가면 결국 균형이 맞는다는 주장이다.
한은 금통위는 우리나라 물가상승률이 몇년 동안 2.0%보다 높았던 만큼 장기적인 평균을 맞추기 위해서 향후 상당 기간 물가상승률이 목표치인 2.0%보다 낮아져도 쉽게 행동에 나서지 않을 수 있다.
다른 하나의 복병은 부동산이다. 최근의 부동산 가격 재상승은 두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가계뿐만 아니라 기업 등 모든 종류의 대출이 늘어나 금융안정을 위협하고 있다. 둘째, 금리인하로 돈이 풀려도 수도권 고가 아파트 위주의 부동산이 이를 흡수하면 통화정책의 효과가 상쇄될 수 있다. 지난 7월 금통위 회의에선 금리인하 상쇄 가능성이 언급됐다.
이 총재는 2023년 8월 기자간담회에서 "가계부채를 연착륙시키는 게 (내가) 한은 총재가 된 이유"라고 말했다. 올해 8월 27일에는 "수도권 부동산, 특히 강남 부동산의 초과수요가 상시 잠재해 있는 우리 사회의 구조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며 "왜 우리가 지금 금리인하를 망설여야 할 만큼 높은 가계부채와 수도권 부동산 가격의 늪에 빠졌는지 (정부의) 성찰이 부족하다"고 경고했다.
이창용의 부동산 경고가 조건이 충족되면 기준금리를 내린다는 뜻인지, 아니면 분위기를 잡으려는 것인지는 금통위가 열리는 10월이 돼야 알 수 있을 듯하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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