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손에 소리는 죽고 산다…무대 뒤 주연 ‘악기 의사들’

정인덕 기자 2024. 9. 4.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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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청중의 박수는 연주자를 향한다. 그런데 연주자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소리를 위해선 수많은 조력자의 도움이 필수다.

왼쪽부터 강규찬 피아노 조율 전문가, 바이올린 제작·복원 전문가 김호기 씨 , 어쿠스틱 기타 수리 전문가 박호일 씨. 이원준 기자 본인 제공 전민철 기자


매일 바뀌는 온도와 습도에서 최고의 소리를 위해 악기를 조율해야 하고, 혹여나 파손이 생기면 악기 고유의 소리를 잃지 않도록 완벽히 복원해 내야 한다.

청중에게는 잘 드러나진 않지만, 연주자에게는 꼭 필요한 부산 공연예술계의 ‘숨은 영웅들’을 만나봤다.

◇ 10여 년 부산문화회관 전속 피아노 조율사 강규찬 씨

- 트럼페터의 꿈 키우다 기술세계 입문
- 백건우·조성진·손열음도 내가 손봤죠

피아노를 조율하는 과정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음정을 결정하는 ‘튜닝(조율)’, 건반의 무게감을 조절하는 ‘조정’, 음의 색깔을 정하는 ‘정음’이다. 이 3개 과정에 필요한 작업은 100가지가 넘는다. 멀리서 볼 때 음정을 조절하는 단순할 것만 같은 과정은 수많은 작업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된다.

부산 금정구 ‘부산악기사’를 방문해 강규찬(56)피아노 조율사를 최근 만났다. 330㎡(100여 평)는 거뜬히 넘을 듯한 작업장에는 낯선 공구와 내부가 훤히 드러난 피아노들이 가득했다. 그는 “내가 절대 훌륭한 조율사가 아닌데 기사에 나갈 만한 사람인지 모르겠네…”라며 거듭 겸손해했다.

강 조율사는 10여 년간 부산문화회관 전속 피아노 조율사로 일하고 있다.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과 부산의 대학교 공연장 피아노도 다수 관리한다. 이 기간 중 그의 조율을 받은 피아노로 공연한 피아니스트를 나열하자면 백건우 조성진 손열음 등 수없이 많다.

“요리를 내놓는 셰프의 마음입니다. 손님의 첫 숟갈에 셰프가 가장 긴장하듯, 연주자가 처음 피아노를 만질 때 가장 긴장되죠. 찡그리면 마음이 철렁 내려앉고, 별 탈 없으면 기쁘죠. 연주자의 말에 귀 기울이며 원하는 상태로 맞추려 노력하지요.”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그는 고신대 음악학과에 진학하며 트럼페터로서 꿈을 키웠다. 대학 졸업 후 창원·울산 시향 등에 응시했지만 낙방했고, 생계를 위해 부산진구 양정동에 자리한 목화악기에서 악기 판매업에 종사했다. 하지만 매일 무언가에 집중하고 몰두하던 것이 사라지자 공허함을 느꼈다. 그는 피아노 조율을 배워야겠다 결심했다.

“학원 다니며 조율을 배우던 중, 피아노 조율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로 이직했습니다. 가게가 분점을 구포에 냈는데 그때 분점에서 혼자 일하며 악기 조율·복원 기술과 기본 프로세스를 알게 됐죠. 잠자는 시간 빼고는 다 피아노 조율에 쏟아부었어요. 그 기간이 10여 년 됩니다. 학창 시절 모든 걸 쏟은 트럼펫을 그만두며 했던 ‘다음에 일하는 분야에서는 1등을 꼭 해야겠다’는 다짐 덕분 같아요,”

현실적인 상황이 갖춰졌을 때 그는 혼자 힘으로 ‘부산악기사’를 열었다. 처음엔 한 명의 고객도 오지 않았지만, 어느덧 입소문을 타 조율을 부탁하는 손님이 없는 날이 없는 지금에 이르렀다. 지금은 제자를 키워 독립시키는 일도 함께 한다. “꼭 필요한 작업만 정직하게 하다 보니 신뢰가 쌓인 덕이라 여깁니다. 조율은 극소수를 제외하곤 생계유지가 어려운 업종입니다. 정직하게 일하는 실력 있는 조율사를 양성해, 60%는 같은 진단을 할 만큼 정직하고 수준이 올라온 업계가 됐으면 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 부산 대표 바이올린 제작·복원 전문가 김호기 씨

- 시향 단원 활약중 질환으로 끝내 은퇴
- 퇴직금 털어 伊‘현악기제작학교’ 유학

우리나라 악기 제작자들에게는 아픔이 있다. 최근에는 많이 옅어졌지만, ‘국산 악기’ 선입견 탓이다. 수준이 높더라도 국산 악기는 상대적으로 좋지 못한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런 상황에서 부산에서 20여 년 세월 자리를 지켜온 바이올린 제작·수리(복원) 전문가가 있다. 부산시립교향악단 단원에서 부산을 대표하는 바이올린 제작·복원 전문가로 변신한 김호기(63) 씨다. 그는 부산도시철도 2호선 수영역 10번 출구 인근에 자리한 ‘김호기현악기제작수리실’을 운영한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그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는 학생이었다.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레슨 대신 혼자 연습하며 1984년 부산시향 단원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8년째 되던 1991년 손가락 마비 증을 느꼈고, 연주자로서 삶을 마치게 됐다. “네 번째 손가락이 내려가면 잘 올라가지 않았어요. 손에 맞게 운지법을 고쳐가며 연습에 매진했지요. 그러던 중에 존경하던 당시 지휘자 마크 고렌슈타인마저 부산시향을 떠나게 됐어요. 연주를 그만둬야겠다 결심한 순간이죠.”

사표를 내며 어떤 일을 할지 많이 고민했다. 어릴 적 손재주가 있다는 말을 많이 들은 그는 악기 제작·복원을 해보자고 결심했고, 이탈리아 크레모나의 ‘스트라디바리 국제현악기 제작학교’로 향했다. 언어도 모르는 채 퇴직금 1000만 원만 들고 떠난 이탈리아 생활은 어려웠다. 분신 같은 악기를 팔고도 ‘방콕(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의미)’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경제적으로 힘들었고, 수업을 잘 이해하지 못해 방과 후 친구가 이해할 때까지 설명해 주기도 했다. 만학도로 치열하게 수학한 끝에 1997년 부산으로 돌아와 1998년 그의 작업실을 열었다.

작업실을 운영하며 많은 보람을 느꼈다. 어릴 때 바이올린을 제작해 줬던 아이가 성인이 돼 수준 높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돼 찾아와주었고, 음악 열정이 대단하지만 사정이 딱한 아이의 악기를 무료로 수리해 주고 연습장소도 제공했는데 그가 한 오케스트라 종신단원으로 성장한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참 좋은 악기를 씁니다. 외국인이 보면 학생이 너무 값비싼 악기를 쓰는 것 아니냐고 놀라기도 합니다. 좋은 악기를 못 가진 학생은 스트레스가 심하죠. 그들의 악기를 스트라디바리처럼 만들 순 없지만, 지금의 소중한 악기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소리를 낼 수 있게 돕고 싶었습니다. 제가 어렵게 공부해 더 마음이 가는 것도 같고요.”

그는 이곳에서 음악감상실 ‘돌체 비타’도 함께 운영한다. “행복은 감동에서 온다고 생각해요. 여행 가는 이유, 자식의 성적이 잘 나왔을 때 기분 좋은 이유도 감동했기 때문이죠. 가장 쉽게 여러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예술, 음악입니다. 여기서 많은 분이 감동을 받아 가시면 좋겠어요. 제작·수리를 통해서도 가능한 오래 감동을 드리고 싶습니다.”

◇ 1세대 기타 리페어샵 ‘페이스 뮤직’ 대표 박호일 씨

- 유명 기타리스트 줄서던 세팅의 성지
- 바다가 좋아 서울서 부산으로 옮겼죠

한국 기타 시장에 ‘리페어’ 개념이 흔치 않던 시절, 1세대 리페어샵으로 이름을 떨치던 가게가 ‘페이스 뮤직’이다. 대전과 서울에 자리해 유명 기타리스트는 물론 동호인이 끝없이 찾던 이곳은 현재 부산에 남아 세팅과 복원 등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부산 연제구 ‘페이스뮤직 부산점’에서 박호일(50) 대표를 최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박 대표는 대학에서 토목을 전공했다. 음악을 좋아해 국내 최대 기타 제조사 ‘콜트’에 현장관리직으로 입사했고, 2006년 노사 분규로 회사를 나오게 됐다. 함께 회사를 나온 선배와 2008년 대전에서 동업을 시작한 것이 ‘페이스 뮤직’의 출발이다. “당시 어쿠스틱 기타를 전문으로 하는 리페어샵이 많지 않았어요. 수도권에서 대전으로 수리를 맡기러 오는 분이 많았죠. 그러다 보니 고객이 많은 서울로 가게를 옮길 결심을 했던 것 같아요.”

서울 합정동에서 다시 문을 연 페이스뮤직은 줄이 끊이지 않을 만큼 큰 사랑을 받았다. 쉴 틈 없이 바빴다. 후배 1명이 더 합류해 가게가 안정되기도 했고, 당시 확장도 구상 중이던 그는 2012년 부산도시철도 1호선 교대역 인근에 ‘페이스뮤직 부산점’을 분리 개업했다. 지금은 더 넓은 공간을 찾아 부산도시철도 3호선 거제역 인근으로 이전한 상태다.

“부산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지만, 본래 좋아했던 곳입니다. 지인이 많기도 했고, 워낙 낚시를 좋아해 바다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서울의 페이스뮤직이 문을 닫아서 사실상 이곳이 유일한 페이스뮤직인 셈이죠.”

오랜 기간 기타를 수리하며 그는 큰 보람을 느낀다. 특히 크게 파손된 아버지 유품을 복원해 달라던 손님이 수리가 완료됐을 때 기뻐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기타를 다루는 사람은 악기에 큰 애정을 담습니다. 믿고 맡기기가 쉽지가 않지요. 그분들이 만족하는 모습을 보고 보람과 희열을 크게 느끼죠. 최근엔 신뢰에 보답해야겠다는 부담감도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수제 어쿠스틱 기타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우리나라에 수제로 어쿠스틱 기타를 만드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많은 기타를 보고 수리해 온 터라 자신감이 조금씩 들기도 하고요. 정말 좋은 기타를 한번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는 기타를 잘 관리하는 팁도 알려주었다. 우리나라는 계절 변화가 뚜렷해 습도 차이도 심하다. 습도에 의한 목재 변형 등으로 기타를 수리하는 경우가 많다. “목재 악기는 습도에 취약합니다. 40~50%가량 습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죠. 겨울에는 가습기, 여름에는 제습기를 쓴다면 악기 관리를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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