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대란’ 직접 겪어보니…의료개혁 정책 유감 [왜냐면]

한겨레 2024. 9. 4. 18:4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 8월29일 오전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이 대형 화면을 통해 중계되고 있는 서울의 한 대학병원 로비에서 환자와 보호자가 ‘의료개혁’ 관련 방송 내용을 지켜보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이세정 | 목사·전 경기도 복지여성실장

지난 8월20일 저녁 아내가 고열과 복통으로 실신 상태에 처했다. 119 구조요원들이 신속하게 왔으나 경기 수원시 내 병원 응급실에서는 받아주지 않았다. 이유인즉, 응급의사 인력이 부족하고, 2년 전 간이식 수술과 2개월 전 담도협착증 시술을 받은 중증 환자는 손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간이식 수술을 시행했던 서울 ㅅ병원으로 1시간 반을 넘게 이동하여 겨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 상황을 겪으며 24시간 운영해야 하는 응급의학과와 고난도 수술의 지식과 경험이 필요한 이식외과 등 필수의료 인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체감했다.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 개혁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지역에서 외과, 응급의학과, 소아과, 산부인과 등 필수의료 인력을 확충하기 위함이다. 의사가 늘어난다고 필수 인력이 늘어날까? 나는 정부가 의사 증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껴왔다. 정부의 논리는 이른바 ‘낙수효과’라는 것인데, 의대 졸업생들이 비급여가 많고 돈벌이가 되는 성형외과나 피부과로 몰리겠지만, 시장이 포화상태가 되면 저절로 필수의료 분야로 갈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는 매우 비과학적 예측이며, 의료 인력 문제를 사회 인프라 측면이 아닌 시장의 원리로 보았다는 점에서 정책 관점이 잘못됐다. 또한 인기 진료과목에 가지 못한 의사들이 필수의료로 간다고 보는 것은 처음부터 사명의식을 갖고 필수 의료과목을 선택한 의사들을 경시하는 것이다.

나는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에서 “의사단체에 증원 규모를 내라고 했지만, 한 번도 낸 적이 없다. 정부가 기다리다 기다리다 (결정했다).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데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고 말한 것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의료계가 통일안을 준비하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제안한 뒤 이것이 현실이 되자 밀어붙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의사단체가 여럿이라 통일된 안을 못 가져오면, 각 단체의 공통된 제안에 근접한 수를 갖고 협의하면 되는 일이다.

2025년 의대 정원(5058명)은 2024년(3059명) 대비 65% 늘리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증가 폭이 지나치게 컸다. 의료계 입장에서는 그동안 의사 증원이 없던 상태에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의사 정원이 효과를 보려면 10년 이상 걸린다”고 했다. 그렇다면 10년 동안 매년 1000명씩 늘려도 되지 않은가. 심지어 국민 대부분은 2000명이란 숫자의 근거조차 모르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증원의 근거로 제시한 3개 논문의 저자 모두 진의가 잘못 전달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의료 개혁 정책의 이해관계자는 의사, 의료기관, 환자다. 이 정책은 국민의 건강에 직결돼 있기 때문에 환자와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와의 원만한 협의가 가장 중요하다. 이들이 지불하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는 겸손, 인내심, 포용심을 갖고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지금 의료 개혁에 붙여진 또 다른 이름은 ‘의료 대란’이다.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병원과 학교를 이탈하여 오히려 진료 공백과 의사 양성에 차질이 발생하고, 위급한 환자들이 진료를 제때 받지 못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응급실마저 붕괴 직전이라는 말이 나온다. 의료 개혁이 의료 대란, 응급실 위기를 초래했다면 엄연한 정책의 실패다. 이런 사태를 반영하듯이, 응급실과 일반 병동에서 마주치는 의사들의 얼굴에서 힘겨워하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입원해 있는 아내와 내가 미안스러울 정도였다. ‘10년 뒤 의사 부족’이 지금의 환자를 고통받게 하는 명분은 되지 못한다. 필수·지역의료를 확충하고, 의사들이 소신껏 필수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지원제도를 마련하는 데 중점을 두고 의료개혁 정책을 수정·보완하기 바란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