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왔다 [똑똑! 한국사회]
원혜덕 | 평화나무농장 농부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불쑥 찾아왔다.
농사짓는 사람은 계절을 미리 맞는다. 여름이나 가을에 거둘 채소와 곡식을 봄에 심기에 하는 말이다. 봄에 상추, 아욱, 쑥갓, 근대, 봄배추, 열무, 브로콜리, 양배추, 감자 등을 밭에 가득 심었다. 일찍 잘 자란 상추는 계속 뜯어 먹고, 아욱과 근대는 틈틈이 수확해서 된장국을 끓였다. 봄배추와 열무는 뽑아서 여름 김치를 담갔다. 양배추는 냉장 창고에 넣어놓고 감자는 햇빛이 들어가지 않는 튼튼한 종이 상자에 넣어두고 먹고 있다. 봄에 심어 밭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은 이제 수확을 시작한 홍고추뿐이다. 콩과 들깨는 6월에 들어서서 심었으니 가을에 수확한다.
이 모든 것을 수확한 밭은 그냥 내버려두었다. 산 아래 있어서 경사가 있는 우리 밭은 폭우가 오면 맨땅인 경우 표토가 다 쓸려나간다. 오랫동안 유기물과 퇴비를 넣어주어서 비옥하고 부드럽게 된 흙이 장마 때 쓸려나가지 않도록 우리는 여름 동안 풀이 무성하게 자라라고 밭을 갈지 않는다. 호랑이가 새끼를 친다는 옛말이 김을 매지 않아 밭에 풀이 무성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 말이 딱 맞도록 여름에 우리 빈 밭은 풀이 무성하게 자란다.
그렇게 두달 쉬고 있던 밭에 가을 채소를 심었다. 먼저 밭을 한번 갈고 밭이 까맣게 덮이도록 잘 발효시킨 거름을 내고 흙을 잘게 부쉈다. 골을 타서 이랑을 짓고 가을 채소를 뿌리거나 옮겨 심었다. 김장배추도 심고 양배추 모종도 옮겨심고 쪽파도 심고 실파도 심었다. 지난가을에 혹은 봄에 심은 채소들의 자리를 전부 바꿔서 심었다. 양파를 심었던 자리에는 가을배추와 양배추를 심고, 봄배추와 양배추를 심었던 곳은 가을무와 총각무를 심고, 바질과 브로콜리를 심었던 자리에는 이제 10월이 되면 양파 모종을 내다 심을 것이다. 뿌리채소인 가을무와 총각무 씨도 뿌렸지만 대부분 잎채소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가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빵을 많이 먹으면서 소비가 높아진 샐러드 이야기다. 우리나라처럼 여름에 기온이 높고 습한 나라에서 한여름에 잎채소는 자라기 어렵다.
여름철에 모둠 쌈이나 샐러드에 넣을 잎채소를 기르면 한여름에 극성인 벌레와 병을 잡느라 농약을 많이 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수확량은 적어서 여름 채소는 대체로 금값이다. 여름에 상추가 너무 비쌀 때 상추에 고기를 싸 먹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상추에 싸서 먹는다고 하는 우스갯말이 돈다. 한여름에는 그만큼 잎채소를 기르기 어렵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유럽 등 서양은 여름에 비록 온도는 높지만 습도가 낮아서 잎채소를 기르기가 어렵지 않다. 우리는 잎채소가 잘 자라는 봄과 가을에는 샐러드와 쌈 채소를 실컷 먹고, 여름에는 잎채소는 조금만 먹고 고추, 오이, 가지, 토마토, 호박, 감자 등의 열매채소와 뿌리채소를 많이 먹었으면 좋겠다.
한여름 두달 비어 있던 밭이 새로 올라온 싹과 옮겨 심은 모종들로 가득 찼다. 보고 있노라면 두번째 봄을 맞은 느낌이 든다. 봄에 심어 자라는 작물들은 밭에 풀이 무성하여 쫓아다니면서 풀을 잡기 바쁜 데 비해 가을에는 김매는 일이 비교적 가볍다. ‘5월 농부, 8월 신선’이라는 말이 있다. 음력으로 말한 것이니까 실제로는 6월 농부, 9월 신선이 되겠다. 여름에는 논의 김을 매주고 밭을 돌보느라 일이 많지만 수확을 하는 9월은 신선처럼 여유롭다는 말이다. 벼농사를 보며 나온 말이지만 일반 농사도 마찬가지다. 여름의 그 무서운 풀의 기세가 말복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면 거짓말같이 완전히 꺾인다. 배추밭이든 무밭이든 채소 사이의 풀을 가볍게 괭이로 한번 잡아주고, 남은 풀이 여기저기 길게 자라면 한번만 손으로 뽑아주면 된다. 잡초의 기세가 꺾이면 마음도 한결 여유로워진다.
지금의 세상도 그럴 것이다. 풀만 무성한 듯한, 견디기 어려운 이 여름을 지나면 언제까지고 꺾이지 않을 것 같은 험한 기세가 꺾일 것이다. 그것을 믿고 위로받는 계절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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