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큰손들 이렇게 많이 온 건 처음…K미술 성장 체감했다"
불황에도 빛난 韓 미술
차분한 프리즈·분주한 KIAF
판매 저조한 외국 작가에 비해
김윤신·전준호 등 관람객 호평
수준 높아진 韓 갤러리·신진 작가
프리즈 개최 후 경쟁력 강화 매진
LG 등 기업과 협업도 매년 증가
개성있는 신인들에 기회 열어줘
외국인 컬렉터들 관심 쏟아져
이우환 등 국내외 대형전시 증가
한국 문화 공부하는 컬렉터 늘어
올해로 3년 차를 맞은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차분했다. 4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VIP를 상대로 문을 연 프리즈에서는 수십억원대 작품 판매 소식을 좀처럼 들을 수 없었다. 세계적인 해외 갤러리들이 가져온 작품의 가격대와 이름값도 지난 2년보다 전반적으로 떨어졌다. 미술시장 불황의 영향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한국 작가와 갤러리들을 둘러싼 분위기만큼은 뜨거웠다. 프리즈만 들르고 KIAF를 ‘패싱’하던 컬렉터들이 다시 KIAF를 찾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 새 국내 갤러리와 KIAF의 수준이 확 높아졌다”(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등의 긍정적인 평가도 쏟아졌다. 최근 부쩍 강해진 ‘한국 미술의 힘’을 체감했다고 국내외 미술 관계자들은 말했다. KIAF-프리즈 3년 차를 맞아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한국 미술계의 모습을 정리했다.
호평 쏟아진 국내 갤러리 전시
이날 해외 주요 갤러리의 프리즈 판매 실적은 예년에 비해 저조했다. 주요 아트페어가 열릴 때마다 첫날 팔리던 쿠사마 야요이의 인기 연작 ‘호박’들조차 이날은 주인을 찾지 못했다. 가격이 100만달러(약 13억4000만원)를 넘어서는 작품부터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전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태국의 한 ‘큰손’ 컬렉터는 “프리즈에서 살 만한 작품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고 한국경제신문에 털어놨다.
반면 국내 갤러리의 판매는 예년 못지않은 수준의 선방이었다. PKM갤러리는 유영국의 회화 작품을 150만달러(약 20억원)에, 제이슨함갤러리는 이목하의 그림을 10만달러(약 1억3000만원)에 팔았다. 전시와 관련한 외국 컬렉터의 호평도 쏟아졌다. 전준호의 조각 작품으로만 부스를 꽉 채운 갤러리현대, 백남준의 대형 작품 및 김환기의 회화와 달항아리를 감각적으로 배치한 학고재갤러리 앞은 해외에서 온 관람객들로 붐볐다.
프리즈와 대조적으로 KIAF 분위기는 활기찼다. 한 국내 갤러리 대표는 “지난해 VIP 개막일에 관람객 대부분이 프리즈로 몰려 KIAF 행사장이 한산했는데, 올해는 오전부터 관객이 많다”고 했다.
내실도 탄탄했다. 올해 베네치아비엔날레 본 전시에 참여한 김윤신의 작품으로 솔로 부스를 꾸민 국제갤러리는 이날 1억원 상당의 조각 작품을 비롯해 회화 여러 점을 판매했다.
강해진 ‘한국 미술의 힘’
이런 결과는 한국 미술에 관심이 높아진 덕분이라는 게 미술계의 평가다. 이날 행사장에는 영국의 세계적 미술관 서펜타인갤러리의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예술감독을 비롯해 해외 미술계 주요 인사가 여럿 눈에 띄었다. 도형태 갤러리현대 대표는 “유럽 최고의 미술 재단 중 하나인 스위스 루마파운데이션 설립자 마야 호프만도 이번에 한국에 와서 존 배, 이건용 작가 등을 만났다”며 “세계 미술계 거물들이 우리 작가들을 만나러 이렇게 많이 방한한 건 올해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관심이 늘어난 배경에는 국내 갤러리의 상향 평준화가 있다. 프리즈 개최로 자극받은 뒤 경쟁력 강화에 매진한 덕분이다. 2022~2023년 프리즈 참가에 실패하고, 올해 입성에 성공한 갤러리신라가 대표적 사례다. 이준엽 대표는 “지난 2년간 갤러리 시스템을 재정비하고 작품·작가를 소개하는 역량을 크게 키울 수 있었다”고 했다.
아트페어 자체 수준도 높아졌다. 개성 있는 신진·중견 작가를 조명한 특별전 ‘키아프 온사이트’는 참신한 기획 덕분에 호평받았다. 전반적인 동선과 부스 배치도 전년에 비해 크게 개선됐다는 게 관람객들의 평가다. 올해부터 추가로 사용하는 그랜드볼룸 공간에서는 프리즈보다 훌륭한 근현대 거장 작품이 눈에 띄었다. 페르난도 보테로의 대형 작품을 선보인 아트오브더월드갤러리, 피카소 작품을 갖고 온 독일 디갤러리 앞에는 관람객 줄이 늘어섰다.
관람객·컬렉터의 높아진 눈
가장 중요한 건 전반적인 관람객과 컬렉터들의 ‘보는 눈’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국내 한 화랑 대표는 “미술시장 불황으로 투기 수요가 확 줄어들었지만 한국 미술과 작가를 적극적으로 공부하고 사랑하는 ‘진짜 컬렉터’는 늘었다”고 말했다.
KIAF-프리즈 기간 국내에서 열리는 전시들의 전반적인 수준이 올라간 것도 한국 미술의 저변을 넓히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엘름그린&드라그셋, 송은의 피노컬렉션 등 해외 거장전은 물론이고 국제갤러리의 함경아, 아트선재의 서도호 등 한국 작가를 조명하는 양질의 전시가 갈수록 늘고 있다. 페이스갤러리의 이우환과 마크 로스코 2인전, 학고재갤러리의 엄정순·딩이·시오타 치하루 3인전 등 국내외 작가를 섞어 ‘세계 속 한국 미술’의 면모를 부각하는 전시도 늘었다.
예술과 기업의 협업도 해를 거듭하며 진화 중이다. 프리즈 서울의 메인 스폰서인 LG는 투명 올레드 TV를 통해 고(故) 서세옥 화백과 아들인 서도호 작가, 서을호 건축가의 협업 작품 전시를 선보여 주목받았다. 브레게는 스위스 본사에서 초빙한 장인이 시계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BMW는 형형색색으로 칠한 스포츠카를 선보이며 관람객들을 끌어모았다.
성수영/최지희/유승목/김보라/안시욱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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