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농사 지었는데 농민 인정 못받아”…제도 밖 여성농민
공동경영주·농민수당 등 개선점 논의
‘행복바우처’ 연령 상향 주장도 힘 얻어
“남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농사일에 쏟고 있지만, 정작 농민수당은 남편에게만 지급됩니다. 지방자치단체 사업을 신청할 때도 남편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저는 농민이 아닌 걸까요?”
여성농민의 절박한 목소리가 2일 전라남도의회 중회의실에서 울려 퍼졌다. 오미화 전라남도의원실 주관으로 개최된 이 토론회에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광주전남연합회(회장 고송자) 소속 여성농민 4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토론회엔 ▲겸업 여성농민 ‘공동경영주 등록’ 허용 ▲‘농어민 공익수당(이하 농민 수당)’ 제도 개선 ▲‘여성농어업인 행복바우처’ 제도 대상 연령 확대 ▲농식품부의 ‘여성농민 실태조사’ 한계점 보완 ▲청년여성이 살기 좋은 성평등한 농촌사회를 위한 조례개정 방향 등이 중점적으로 논의됐다.
이러한 논의의 배경에는 여성농민의 실제 역할과 제도적 지위 사이의 괴리가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남지역 농가인구 27만8000여명 중 52.6%(14만6330명)가 여성이다. 그러나 농업경영주로 등록된 여성은 전체 농업경영체 24만5000여 개 중 35%(8만6000여개)에 불과하다. 농업경영체에 등록해야 농어업 관련 각종 융자와 보조금 지원의 기준에 들 수 있기 때문에 여성농민들은 농민 수당이나 바우처 등 각종 지원사업에서 배제되고 있다.
신춘자씨(나주 왕곡면)는 “40년째 농사를 지었지만 여성농으로서 지위를 인정받지 못해 농민 수당을 경영주인 남편만 받고 있다”며 “한동안 남편에게 돈을 타다 써야 해 눈치를 봐야 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 여성농민도 “고추건조기가 필요해 지자체에 지원사업을 신청하려는데 사업신청을 농업경영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며 “여성농민이 농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만큼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전남도 차원에서라도 법적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힘써달라”고 호소했다.
2016년 도입된 공동경영주 제도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였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농업경영주가 농업 외 겸업을 해도 경영주의 지위를 유지하는 반면 공동경영주는 겸업으로 소득이 생기면 그 지위가 상실되기 때문이다.
김승애 전여농 광주전남연합 정책위원장은 “농민들이 농업에만 종사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좋겠지만, 실상은 1년 힘들게 농사지어 얻은 농업소득이 1000만원 수준에 그치기 때문에 겸업을 할 수밖에 없다”며 “현실과 형평성에 맞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민 수당을 가구별이 아닌 농민 개인별로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었다.
이수미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부소장은 “경남도의 경우, 농민수당 지원대상자를 공동경영주까지 확대하면서 등록수가 2021년 2만7959명에서 2023년 8만5002명으로 증가했다”며 “정책이 개선되어야 공동경영주 등록률을 높일 수 있다”고 밝혔다.
‘여성농업인 행복바우처’ 제도의 대상 연령 확대 요구도 현장에서 많은 공감을 얻었다.
행복바우처는 농어촌 지역 여성 농어업인에게 문화 활동 기회를 제공해 삶의 질을 향상하자는 취지로 2012년 충북에서 처음 도입, 이후 광역 지자체로 확대됐다. 미용실·영화관·목욕탕·스포츠용품점 등 문화·서비스 분야에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을 바우처 카드 형태로 지원하는 방식이다. 지원금액과 대상은 지역별 여건에 따라 다르다.
전남도의 경우 연 1회 1인당 바우처 포인트 20만원을 지원한다. 영농에 종사하는 20세 이상~75세 이하 여성농어업인이 그 대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령제한으로 76세 이상은 지원에서 제외된다.
김점석 순천시 여성농민회 사무국장은 “76세 이상 여성농민들도 여전히 농업 현장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지원 대상에서 제외돼 심각한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며 “사업의 본래 취지를 고려하면, 연령을 기준으로 지원 대상을 제한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강하춘 전남도 농축산식품국 농업정책과장은 “행복바우처 지원대상을 80세까지 확대하라는 현장 요구를 인지하고 있다”면서도 “추가 재원이 들어가는 만큼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농식품부가 시행한 ‘2023년 여성농업인 실태조사’의 한계점도 지적됐다.
이 실태조사의 모집단은 농업경영체에 등록된 여성 2000명에 불과해, 전국 여성 농민(55만2442명)의 0.36%만을 대상으로 해 실상을 파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또 75세 이상 여성농민이 조사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오미화 의원은 “이번 실태조사 결과로는 75세 이상 고령 여성농업인이나 2종 겸업농 형태의 여성농업인들이 겪는 어려움과 요구사항을 제대로 반영하기 어렵다”며 “지역 실정에 맞는 정책을 수립하려면 전남도 차원의 자체적인 실태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토론회에 앞서 전여농 광주전남연합회는 전남도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여성농민 법적 지위 보장’을 비롯해 ▲산지 쌀값 안정화 대책 ▲근본적인 기후재난 대책 등을 요구했다.
전여농 광주전남연합회는 “쌀 재고과잉과 기후재난으로 농업환경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며 “전라남도청과 의회가 내년도 예산안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여성농민의 지위와 권리를 보장하는 정책을 반드시 포함해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미화 의원은 “농촌의 미래를 이끌어갈 핵심 주체인 여성농민의 지위향상과 권리보장을 위한 정책 개선이 시급하다”며 “성평등을 지향하는 전남도가 여성농업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성별과 나이와 관계없이 동등한 기회와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정책변화와 개발에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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