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시각] R&D엔 눈 감고, 향료·색소만 허용…우리 술 열풍 ‘사상누각’ 된다
우리 술(전통주) 업계 최대 관심사는 막걸리 주세법 개정이다. 현행 주세법상 막걸리는 향료와 색소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과일 막걸리를 만들려면 실제 과일을 넣어야 한다. 그런데 기획재정부가 최근 발표한 세법 개정안에서 향료와 색소만 사용해도 막걸리라는 명칭을 쓸 수 있게 허용한다고 하면서 업계의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진짜 과일을 넣지 않고 과일 맛이 나는 향료만 넣고도 막걸리라는 이름을 쓸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막걸리에 향료와 색소를 허용하는 것은 규제 타파가 아니라 정부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태만과 같다. 정부는 유사 막걸리에 막걸리 표기를 할 수 있으면 시장이 확대되고, 수출에도 물꼬가 트일 것이라고 기대한다. 맛과 향이 더 다양해지는 게 소비자들을 위해서도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향료와 색소 첨가라는 쉬운 선택지는 이 문제를 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를 풀기 위해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젊은 양조인들을 좌절하게 만드는 자충수다.
우리 술의 다양화는 꼭 필요한 일이다. 가수 성시경을 내세운 ‘경탁주’가 연일 매진되고, 오크통에 숙성한 증류주가 인기를 끌고 있지만 우리 술 양조장은 늘 불안하다. 소규모 양조장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천편일률적인 제품이 많고, 소비자의 취향이나 유행이 바뀌면 언제 다시 ‘혹한기’가 닥칠 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려면 우리 술의 경쟁력 자체를 높여야 하고, 당연히 다양한 맛과 향을 내는 술들이 시장에 나와야 한다.
우리 술이 더 다양해지려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인 연구개발(R&D) 지원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 술은 한국 식품인 ‘K-푸드’의 한 카테고리로 자리잡았지만, 정부는 우리 술에 대한 연구 지원에 인색하다. 국가 차원에서 우리 술을 연구하는 기관조차 없다. 과거 한국식품연구원에 우리술연구센터가 있었지만, 팀으로 축소됐다가 지금은 아예 사라졌다. 우리술연구센터에서 우리 술에 들어가는 효모와 누룩, 숙성 용기를 연구하던 연구자들은 단 돈 몇 천만원 연구비도 구하기 힘들어서 몇 년을 진행하던 연구 과제도 포기하고 있다.
이웃 나라인 일본은 국가 차원의 주류총합연구소를 운영하고 있고, 지자체들도 지역 고유의 사케(청주)를 발전시키기 위해 양조용 쌀을 연구하는 연구소를 저마다 운영하는 것과 천지차이다.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 프랑스, 독일처럼 술로 유명한 국가들은 모두 자국 술을 연구하는 전담 기관이 있다. 한국은 소규모 양조장뿐 아니라 전통주를 만드는 큰 기업도 매출이 중소기업 수준에 불과해 자체 연구소나 연구인력을 둔 곳이 드물다.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우리 술의 다양성은 요원한 일이다.
얼마 전 코엑스에서 열린 한 주류 박람회에서 유명 막걸리 양조장 대표를 만났다. 기자가 연재 중인 ‘우리 술과 과학’ 취재를 위해 방문하고 싶다고 했더니 “과학적으로 설명할 게 없다”는 씁쓸한 답이 돌아왔다. 국내 대부분 양조장이 쌀을 포도당으로 잘게 부수는 누룩은 중국산, 포도당으로 발효를 해 알코올을 만드는 효모는 프랑스산을 쓴다고 했다. R&D를 하지 않고 가져다 쓰는 것이다. 우리 술에 진심이라는 백종원 대표의 백술도가가 판매하는 효모도 프랑스산이다. 그나마 국내산을 쓴다는 쌀도 양조용이 아닌 밥을 짓는 쌀이 대부분이다. 사케용 쌀 품종만 100종이 넘는 일본과 비교가 불가능하다.
변변한 누룩도, 효모도 만들지 못하는데 우리 술의 다양화가 가능할까. 누룩과 효모는 오랜 연구와 투자 없이는 만들지 못하는 생물자원이다. 우리 술의 기본 바탕에는 아무런 투자도, 지원도 하지 않으면서 쉽게 맛과 향을 낼 수 있는 향료와 색소는 허용하는 게 정부의 우리 술 진흥 정책인가. 이런 정책으로 전통주 시장을 넓히고, 수출길을 연다는 발상은 그야말로 사상누각(沙上樓閣)이다.
[이종현 과학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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