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 오씨의 경우[백승찬의 우회도로]

백승찬 기자 2024. 9. 4.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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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오텔로>의 종반부 오텔로(오른쪽, 이용훈)가 아내 데스데모나(흐라추히 바센츠)를 살해한 뒤 자해한 채 쓰러져 있다. 예술의전당 제공

“한 전방 부대의 사령관 오모씨가 아내를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건의 목격자들과 경찰의 말을 종합하면, 오씨는 관사에서 아내 A씨를 살해했다. 오씨는 A씨와 자신의 부관 B씨의 외도를 의심했다고 한다. 다투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사람들에 의해 오씨의 오해가 밝혀지자, 오씨는 그 자리에서 후회하며 자살했다. 오씨가 아내를 의심한 배경에는 또 다른 부관 이모씨가 있었다. 이씨는 자신 대신 B씨가 승진한 데 대해 앙심을 품고 오씨를 파멸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씨는 오씨에게 A씨와 B씨의 불륜을 암시했으며, 오씨가 이를 믿지 않으려 하자 A씨의 손수건을 훔쳐 B씨의 숙소에 가져다두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씨는 현장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를 사건 기사 형식으로 쓰면 위와 같이 앙상하게 요약할 수 있겠다. 오모씨는 오셀로, 이모씨는 이아고다. 피의자가 사망했으니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는 종결되고, 한때 미디어에 오르내리다가 더 자극적인 사건에 밀려 잊힐 가능성이 높겠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오셀로>는 내게 그다지 와닿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부풀어오른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몰락하는 맥베스의 직업은 현대의 기업인이나 정치인으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다. 확신을 못해 행동도 못하는 햄릿은 우유부단한 인간의 전형으로 영원히 남아있다.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당한 충격에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게 되는 노인 리어왕은 권력과 노화의 속성을 드러낸다. 반면 오셀로 이야기는 흔하고 자극적인 불륜 드라마처럼 느껴왔다.

최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 프로덕션 오페라 <오텔로>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 작품엔 짧고 선정적인 사건 기사로 요약될 수 없는, 인간의 취약성과 심연이 담겨있다. 작가 아리고 보이토와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는 셰익스피어 원작을 오페라답게 한층 극적으로 바꾸었다. 연출 키스 워너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Othello)가 베르디의 오텔로(Otello)로 바뀌는 과정에서 핵심은 바로 영혼의 외로움”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오셀로는 아내 데스데모나에게 자신의 전공(戰功)을 거만하게 자랑하지만, 오텔로는 트라우마, 피로감, 우울감을 감추지 못한다. “오텔로는 인종적,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을 빼앗기고 고립된 채, 한 여자의 반응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남자다. 그녀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그녀가 없으면 그저 심연을 응시하는 처참한 처지의 인물이다.”

출세가도를 달리는 장성 오텔로가 우울에 빠진 배경에는 그의 인종적 특성도 있을 것이다. 소수인종인 무어인 오텔로가 장군이 되기까지의 과정, 인기 많은 여성 데스데모나와 혼인하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했을 리 없다. 경쟁자들을 제치기 위해 들인 노력은 다른 이탈리아인보다 몇 배는 더 했을 것이고, 작은 실수로 급전직하할 수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아침마다 거울 속의 얼굴을 보며 오텔로는 자신이 유력 가문 출신이었다면 어떠했을지 상상했을지 모른다. 현재의 행복을 쌓아올린 샴페인 잔처럼 위태롭게 느꼈을 수도 있다. 오텔로의 가장 강력한 적은 이아고나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부의 자격지심이다.

오텔로가 상대적 악당이라면 이아고는 절대적 악당이다. 이아고의 아리아 ‘나는 잔인한 신을 믿는다’ 가사는 원작에는 없는 내용이다. 이아고는 ‘교회를 맹신하는 과부처럼’ 악을 믿는다. 정직한 자는 진심을 연기하는 광대며, 인간은 악한 운명에 놀아나다가 죽는다고 말한다.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한다.

이 주장은 무시무시하다. 이 말은 사후의 인과응보도, 생전의 윤리체계도 없다는 극단적 허무주의에 가깝기 때문이다. 종교적 가치관이 지배적이던 17세기에는 이아고가 관념적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현대사회에는 ‘무가치의 가치’를 따르는 이가 상당함을 부정할 수 없다. 법에 의한 처벌 때문에 몸을 사릴 뿐, 믿고 추구할 가치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다수인 사회가 붕괴하는 건 초읽기다.

오텔로 이야기는 ‘가해자의 서사’다. 하지만 이는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가해자를 연민하고 변명할 기회를 주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고귀해보이는 인간에게도 취약점이 있으며, 누구나 끔찍한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이해하자는 뜻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린 가스 테러를 일으킨 옴진리교 신자들을 인터뷰한 <약속된 장소에서: 언더그라운드2>에서 “인간이란 자기라는 시스템 안에 늘 악한 부분 같은 걸 안고 살아간다”며 “그러다 누군가가 어떤 계기로 악의 뚜껑을 확 열어버리면, 거울을 보듯 자기 안에 있는 악과 대면”한다고 말했다. 우리의 마음엔 작은 오텔로와 이아고가 숨어 있다.

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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