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수명 늘고 가입자 줄면 국민연금, 물가상승률보다 덜 올린다(종합)
정부 "그래도 낸 만큼은 돌려줄 것"…다수 선진국 이미 도입
"기금 소진 늦출 수 있어" vs "보장성 악화할 것"
(서울=연합뉴스) 성서호 오진송 권지현 기자 = 정부가 인구·경제 여건의 변화에 따라 연금액을 자동으로 조정하는 제도의 도입을 검토하기로 했다.
기대수명, 가입자 수 등의 변화로 연금재정 상황이 안 좋아지면 연금 인상률을 물가상승률보다 더 낮출 수 있다는 얘기인데, 국민연금의 지속가능성 제고를 위해 도입을 검토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높은 노인 빈곤율 등 국내 상황을 고려했을 때 시기상조라는 지적도 있어 제도 도입을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보건복지부는 4일 제3차 국민연금심의위원회를 열고 이런 내용을 담은 연금개혁 추진 계획을 확정했다.
수명 늘고, 가입자 줄면 연금 줄인다…'자동조정장치' 도입 검토
이번 추진 계획은 지난해 10월 발표한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에 이은 후속 방안으로, '지속가능성 제고'가 주요 목표 중 하나다.
그 일환으로 복지부는 '자동조정장치'(자동안정화장치) 도입을 검토하기로 했다.
자동조정장치란 인구구조 변화와 경제 상황 등과 연동해 연금액 등을 조정하는 장치다.
예를 들어 기대 수명이 늘어나거나 연금의 부채가 자산보다 커질 경우, 출산율이 감소하거나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들 경우 재정 안정을 위해 보험료율(내는 돈)을 올리거나 소득대체율(받는 돈)을 낮추는 방식이다.
국민연금은 소비자물가변동률에 따라 매년 수급자들이 받는 연금액을 늘리거나 줄이고 있지만, 자동조정장치는 아직 적용하지 않고 있다.
복지부는 최근 저출생·고령화 추세와 기금 재정 상황 등을 고려해야 하므로 연금 인상의 속도를 조절할 장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자동조정장치가 발동되는 기간에는 물가상승률에서 '최근 3년 평균 가입자 수'와 '기대 여명 증감률'을 반영해 연금 인상액을 조정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지금은 물가상승률이 3%이면 국민연금도 3% 인상된다.
그런데 기대수명이 늘어나 연금을 받는 수급자는 늘어나고, 고령화로 연금을 내는 가입자가 줄어들면 국민연금 인상률을 1%나 2%로 제한하는 식이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국민연금은 물가상승률에 연동해 매년 연금액을 인상하고 있으나, 자동조정장치를 도입하면 기대 여명과 출생률 등 인구 변화도 연금액 조정에 반영된다"며 "이 경우 연금액 인상분이 물가 상승분보다 낮아질 수는 있으나, 기금 소진 시기는 더 연장된다"고 설명했다.
자동조정장치, 연금 역사 긴 선진국에선 이미 도입
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 국민연금연구원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8개국 가운데 24개국이 자동조정장치를 운영 중이다.
이 가운데 일본은 연금액을 기대수명 연장과 출산율 감소에 연동해 삭감하는 자동조정장치를 '거시경제 슬라이드'라는 이름으로 도입했다.
임금 상승률과 물가상승률에서 '3년 평균 가입자 감소율'과 '평균수명 증가율'을 차감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스웨덴의 경우 기대수명이 늘어나면 연도별 연금 지급액이 축소되고, 연금 부채가 자산보다 커질 경우 균형재정을 달성할 때까지 지급액을 줄이는 방식이다.
독일에서는 경제활동인구와 연금 수급자 규모의 변화에 따라 급여 수준과 보험료율을 자동 조정한다.
핀란드는 기대 여명이 증가하는 만큼 연금액을 조정하고 있다.
성혜영 국민연금연구원 연구위원은 "연금 재정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급여나 기여율, 그리고 연금 수급연령을 자동으로 조정하고자 공적연금에 자동조정장치를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기금 소진 늦출 수 있다" vs "보장성 악화한다"
복지부는 연금 수지 적자나 기금 소진 시점을 늦출 수 있는 자동조정장치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현행 보험료율 9%·소득대체율 40%를 유지할 경우 연금 수지는 2041년 적자를 기록하고, 2056년에는 기금이 소진된다.
이번 정부안처럼 모수 개혁을 통해 보험료율을 13%, 소득대체율을 42%로 올리면 수지 적자와 기금 소진 시점은 각각 2054년, 2072년으로 미뤄진다.
복지부 추계에 따르면 모수 개혁 이후 연금 급여 지출이 보험료 수입보다 많을 때인 2036년에 자동조정장치가 발동될 경우 수지 적자 시점은 2064년으로, 기금 소진 시점은 2088년으로 다시 늦춰진다.
수지 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2054년에 자동조정장치가 발동하면 기금 소진 시점은 2077년까지 연장된다.
복지부 관계자는 "재정 위험신호 등을 고려해 자동조정장치 발동 시점을 다양하게 검토해볼 수 있다"며 "장치를 도입하면 기금 소진이 늦춰지겠지만, 소득 보장 수준이 달라질 수 있어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금을 더 오래 유지할 수 있겠지만, 당장의 보장성을 악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동조정장치 도입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오종헌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사무국장은 "유럽 등에서는 노인 빈곤율이 10% 아래로 낮아진 상태에서 자동조정장치가 도입됐는데,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40%에 육박한다"며 "보장성 강화에 대한 고려 없이 자동조정장치를 도입하면 오히려 노인의 빈곤을 초래하는 연금 개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보장성이 악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동조정장치 도입에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크다.
최영준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자동조정장치를 도입하면 소득대체율 42%의 의미가 없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합의를 위해 굉장히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스란 복지부 사회복지정책실장은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추천을 받은 대표자들이 오늘 국민연금심의위원회에 참석해 연금액 감소 때문에 자동조정장치에 대한 반대 의견을 내셨다"며 "가입자가 계속 줄고, 기대 여명이 더 늘어도 본인이 낸 것만큼은 돌려드린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연금액) 최저한은 있고, 전년도 받은 돈보다 그해 받을 연금액이 적어지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물가 상승분만큼 다 (적용)해주지 않으면 실질 가치만큼은 보전되지 않는 문제는 있다"며 "하지만 지속 가능성을 위한 부담을 서로 나눠야 한다는 취지가 자동조정장치에 반영돼있다"고 덧붙였다.
so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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