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소득 강화보다는 '재정 안정'에 방점…'공'은 국회로
소득대체율은 유지 혹은 소폭 상향 그쳐…자동조정장치 도입도 '재정 안정'에 초점
'국회의 시간' 왔지만, 논의 시작부터 난항…여야 간 시각차로 진통 클 듯
(서울=연합뉴스) 김병규 오진송 권지현 기자 = 정부가 4일 발표한 국민연금 개혁안은 27년 만에 보험료율을 인상하고, 재정이 악화하면 급여액을 줄이는 '자동조정장치'를 도입하는 내용이 담겼다는 점에서 보장성 강화보다는 국민연금 기금의 '재정 안정'에 초점을 맞췄다.
보장성을 의미하는 모수인 명목 소득대체율이 40%까지 낮아지게 돼 있는 것을 42%에서 제동하는 내용도 담겼으나, 작년 국회 연금개혁특위에서 시민평가단의 다수가 찬성했던 50% 상향 조정안에는 한참 못 미친다.
진통 끝에 정부안이 나오며 국민연금 개혁의 공이 국회로 넘어갔지만, 보장성 강화와 재정 안정을 둘러싼 여야 간 공방이 거셀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마지막 개혁인 2007년 이후 17년 만의 개혁이 결실을 볼지는 미지수다.
27년만에 보험료율 오를까…"이대로면 31년 후엔 기금 소진"
정부는 개혁안에서 현재 9%인 보험료율을 13%로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보험료율은 월 소득에서 국민연금 보험료로 부과되는 비율이다. 직장인의 경우 근로자와 사측이 절반씩 부담하지만, 지역가입자는 모두 가입자 개인이 부담한다.
보험료율은 1988년 국민연금 도입 당시 3%였지만, 1993년 6%로 올랐고 1998년 다시 9%가 된 뒤에는 26년째 같은 수준이다. 내년 인상이 된다면 27년 만에 4%포인트나 올라가게 된다.
기준소득월액의 평균(2023년)이 286만원인데, 이 경우 25만7천400원(직장가입자는 근로자와 사측 절반씩 부담)이던 월 보험료가 37만1천800원으로 11만4천400원 오르는 것이다.
정부가 이처럼 보험료율을 큰 폭으로 올리려는 것은 급격한 저출산 고령화로 노인 인구 비중이 커지고 경제활동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국민연금 기금이 고갈 위기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재정추계전문위원회가 작년 3월 발표한 제5차 재정추계 결과에 따르면 국민연금 제도가 현행을 벗어나지 않으면 2041년 수지 적자가 발생하고, 2055년에는 적립기금이 소진될 것으로 예상된다.
적립기금 없이 매년 보험료 수입만으로 국민연금을 운영할 경우 필요한 보험료율을 보여주는 '부과방식 비용률'은 기금 소진 시점에 26.1%, 2078년에는 35%까지 올라갈 것으로 예측된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정부가 마련한 개혁안의 핵심은 모든 세대가 제도의 혜택을 공평하게 누릴 수 있도록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소득대체율은 42% '유지'…"보장성 강화 실망스러운 수준"
정부는 이와 함께 보장성을 뜻하는 명목 소득대체율을 42%로 정하는 내용도 개혁안에 제시했다.
소득대체율은 은퇴 전 소득(평균소득) 중 연금으로 대체되는 비율로, 연금의 소득보장 수준을 의미한다. 연금개혁에서 논의되는 소득대체율은 40년 가입을 전제로 하는 명목소득대체율이다.
명목 소득대체율은 국민연금 도입 때는 70%로 높게 설계됐지만 이후 1999년 60%, 2008년 50%로 낮아진 뒤 매년 0.5%포인트씩 깎여 2028년까지 40%로 조정될 예정이다. 올해는 42%, 내년에는 41.5%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제시한 42%는 올해 명목 소득대체율과 비교하면 '현행 유지'이며, 향후 스케줄 상 40%까지 내려가게 돼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상'이 된다.
정부는 노후생활을 더욱 든든히 보장하기 위해 소득대체율을 42%로 제시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보장성 강화를 주장해온 학자나 시민단체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라고 비판한다.
참여연대와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 300여개 시민단체가 참여한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연금행동)의 정용건 집행위원장은 "보장성 면에서 국회 공론화 과정에 비해 택도 못 미치는 수준"이라며 "(가입기간이 짧은 것을 고려한) 실질 소득대체율은 32.9% 수준인데, 보장성은 눈곱만큼 해주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시민 다수 선택 '50%·13%'와 차이 커…자동조정장치도 '재정 안정'에 방점
정부가 제시한 보험료율과 명목 소득대체율은 지난 21대 국회에서 시민 다수가 선택한 안과 비교하면 명목 소득대체율 부분에서 격차가 크다.
국회 연금개혁 특위 산하 공론화위원회에서 각계로 구성된 시민참여단의 다수는 '명목 소득대체율 50%·보험료율 13% 인상'안을 택했었다.
이후 국회 논의 과정에서 여야는 '명목 소득대체율 44% 안팎·보험료율 13%'로 이견을 좁힌 바 있는데, 정부가 제시한 명목 소득대체율은 이보다도 2%포인트 낮다.
남찬섭 동아대(사회복지학) 교수는 "공론화 과정에서 시민들은 명목 소득대체율을 50%로 높이는 것을 지지했고, 국회 논의 과정에서 42% 이야기는 나온 적이 없는 얘기"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개혁안에서 기대 여명이나 가입자 수 증감을 연금 지급액과 연동해 조정하는 '자동조정장치'의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한 것에 대해서도 사실상 보장성을 낮추는 의도로 보는 시각이 많다.
주은선 경기대(사회복지학) 교수는 "소득대체율을 42%로 정하면서 자동조정장치를 도입하면 급여 삭감 효과가 클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고령이 될수록 연금(급여액)의 삭감이 커서 강력한 급여 삭감 조치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부가 개혁안에 기금수익률을 1%포인트 높이고, 개인연금에 인센티브를 확대해 노후 보장의 한 층으로 활용하겠다고 밝힌 것에 대해서도 불안해하는 시각이 많다. 목표 수익률을 높이면 그만큼 위험 자산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 수익률이 악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연금개혁 마지막 골든타임…국회 논의 과정서 '보장성 vs 재정안정' 진통 예상
정부가 이날 연금개혁의 정부안을 내놓은 만큼 이제 연금개혁의 성패는 국회로 넘어가게 됐다. 국회가 정부안을 토대로 합의안을 도출한 뒤 국민연금법 등 관련 법률을 개정해야 연금 개혁이 성과를 내게 된다.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정부가 단일안으로 국민연금의 개혁안을 내놓은 것은 지난 2003년 이후 처음이다. 문재인 정부 때는 보험료 인상 등 4개 방안을 개혁안으로 내놨다가 여론 때문에 입법을 추진하지 못했다.
연금개혁을 추진할 '국회의 시간'이 돌아왔지만, 국회는 연금개혁을 논의할 기구조차 만들지 못하고 있어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돼 합의에까지 이르기에는 적지 않은 진통이 예상된다.
여당은 특위를 구성해 연금개혁을 논의하자는 입장이지만, 야당은 소관 상임위에서 처리하면 된다고 주장하며 맞서고 있다. 야당은 그동안 여당의 특위 구성 요구에 '정부안이 먼저'라고 대응했었다.
정부안이 보장성 강화보다 재정안정에 힘을 준 만큼 국회 논의 과정에서 이를 둘러싼 논쟁이 거셀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국회의 논의 과정에서도 여야는 보험료율 인상에는 뜻을 모았지만, 소득대체율 수준을 놓고 줄다리기를 했었다.
연령대가 높을수록 보험료율 인상 속도를 빠르게 하는 '보험료율 인상 속도 세대별 차등화'나 자동조정장치 등 정부 안이 담고 있는 구조개혁 조치를 둘러싸고도 여야 간 견해차가 클 것으로 보인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내후년부터는 선거가 계속 이어지니 올해가 미래세대를 위해 연금개혁을 할 마지막 골든타임"이라며 "올해 정기국회에서 합의가 안되는 것은 부대의견으로라도 남겨놓더라도 (합의)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고 말했다.
bk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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