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생명력 부산 좌수영길서 되새겨
임진왜란 때 수영 25의용 의기 서린 '선서바위' 등 이채
전통시장 수영팔도시장서 다양한 먹거리 저렴하게 쇼핑
수영사적공원 천연기념물 안용복 사당 등 문화재 즐비
좌수영길에서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느끼다.
오랜만에 한민족의 역사가 서려있는 부산 수영 좌수영길을 찾았다. 좌수영길은 애써 찾아보지 않으면 알아보기가 힘든 ‘무민사’를 시작으로 팔도시장과 수영사적공원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좁은 주택가 골목 한 켠에 자리한 무민사는 고려 말 공민왕과 반원 정책을 펼치고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최영(1316~1388)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최영 장군이 죽음을 당하자 수영 일대의 염장관인 박중질(고려말 무관)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삼족이 멸하는 화를 입었다. 염부들은 큰 바위에 최영 장군의 넋이 들어있다 하며 제를 지내 박중질의 넋을 함께 기려왔다. 후에 마을 주민들이 바위 아래 사당을 지어 매년 정월대보름 새벽에 제를 지내오다 2006년부터 삼짇날(음력 3월 3일) 수영향우회 주관으로 제를 지내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개국 6년 뒤 ‘무민(장군을 위로한다는 뜻)’이란 시호를 내려 최영 장군의 넋을 달랬다고 한다.
무민사 뒤에 자리 잡은 바위는 ‘선서바위’라고 불린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외적과 싸워야 할 수령과 장수가 도망치자 군사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왜군의 약탈과 살육이 벌어지던 수영에 남아 있던 수군과 성민 25명이 스스로 좌수영을 지키고자 분연히 일어나서, ‘싸우면 이겨서 살 것이요 싸우지 않으면 망하리로다’라며 싸우다 죽기를 피로써 맹세했다고 했다고 한다. 그 장소가 바로 선서바위로 알려져 있다. 7년 간의 전란이 끝난 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동래부사 이안눌은 좌수영성 주민들의 청원에 따라 25 용사의 사적을 확인해 기록하고 이들의 집마다 ‘의용(義勇)’을 붙여 표창했다고 한다. 그때 동래부사 이안눌이 남긴 공적조서가 바로 ‘정방록(旌榜錄)’이다. 정방록은 기록상으로만 알려졌다가 25 의용 가문의 족보 등에서 그 실체가 확인됐다. ‘김가정방록’, ‘최가정방록’ 등이 그것이다. 수영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는 김종수(74) 씨가 2021년 이들 자료를 모아 ‘수영 25의용 정방록을 찾다’(도서출판 비온후)라는 책을 펴냈다.
좁은 주택가 골목을 벗어나 수영팔도시장으로 접어들었다. 팔도시장은 조선시대 좌수영장을 유래로 한다. 1832년에 간행된 ‘동래부 읍지’에 따르면 좌수영장은 매월 5일 10일 15일 20일 25일 30일에 선 정기시장이었다. 경상 좌수영(조선 시대 경상 좌도 수군 진영)과 수영강을 끼고 있는 편리한 교통 환경이 이 지역에 시장이 발달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좌수영장의 전통이 현재 수영팔도 상가시장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전국 방방곡곡 팔도에서 온 물건이 유통된다고 해서 팔도시장이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지만, 상인 김팔도 씨로 부터 파생된 이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지금도 일제시대 김 씨가 이곳에 상가 건물을 세웠다는 얘기가 회자된다. 흔히 수영 팔도시장으로 부르는 시장의 공식 명칭이 왜 ‘수영팔도 상가시장’인지 설명된다. 지금도 김 씨가 세웠다는 건물이 시장에 있다. 하지만 광복 이후 김 씨는 상가를 정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 씨가 원래 재일교포라는 설도 일부에서 나오고 있다.
이렇듯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시장의 역사가 오래됐지만, 수영팔도시장이라는 이름은 비교적 최근에 붙었다. 특히 한국전쟁으로 피난을 왔던 많은 실향민들이 현재의 수영 민락 센텀 등지에 임시 보금자리를 꾸미고 생계를 위해 삶의 터전을 만들어 가면서 시장이 급격히 성장했다고 한다. 이 또한 전쟁의 산물이라고 하겠다. 수영팔도 상가시장은 1969년에 종합시장으로 설립됐다. 현재 상가 주택 복합형 시장으로 점포 수는 110여 개, 노점 100여 개가 영업중이며 상인 조직으로 수영팔도 상가시장 상인회가 있다. 수영팔도 상가시장은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우선 인근에 수영 교차로가 있어 다양한 노선의 시내버스와 마을버스가 다닌다. 또 부산도시철도 2호선과 3호선의 환승역인 수영역이 있다. 덕분에 수영동 주민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주민들까지 주 고객층이다.
수영교차로에서 북쪽으로 2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수영사적공원은 조선시대 동남해안을 관할했던 수군군영인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던 자리다. 이 공원에는 부산시 지정 유형문화재인 수영성 남문, 시 지정 기념물인 25의용단을 비롯한 수영야류 등 무형문화재 3종, 좌수영 성지 및 곰솔, 푸조나무 등 천연기념물 2종, 안용복 장군사당 등 비지정 문화 유적 5종이 있다. 팔도시장을 지나 처음 만나는 곳은 좌수영성 남문, 실제는 동문이다. 애초 좌수영성 동문에서 팔도시장을 거쳐 지금의 수영 현대아파트 관리사무소 쪽 군선 정박지(선소) 쪽으로 관아거리가 펼쳐졌다. 무지개처럼 돌로 만든 홍예문 양식의 남문은 예전에 수영초등학교에 있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남문 양쪽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석상 조형물 ‘박견’ 한 쌍이 있다. 눈은 퉁방울처럼 커서 해태상처럼 보이지만 분명 개 모양이다. 박견은 조선 개를 뜻하며,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고 나쁜 기운들을 막아주는 수영성의 상징물이자, 수호신이라고 할 수 있다. 남문에서 좌수영의 수사 선정비군을 지나 안용복 사당(수강사)으로 향한다. 안용복은 조선 숙종 때 좌수영 수군인 능로군이었는데, 왜인들에게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약받는 등 큰 업적을 세워 장군으로 추앙받았다. 수강사에서 나와 원래의 좌수영 남문 터로 간다. 주거지 주민주차장 주변으로 옹성 모양의 조형물을 조성해 놓았다. 그 다음은 좌수영성지 안내문 앞. 좌수영성은 둘레 2784m, 높이 4m에 달했던 것으로 확인됐지만, 남은 성곽은 얼마 없다. 상비병력 2만 명을 거느렸던 옛 위용은 현재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의 남문 뒤편에 있는, 400살이 넘는 곰솔(천연기념물 270호)이 옛 좌수영의 일단을 보여주는 듯하다. 좌수영 당시 곰솔은 나무로 만든 군선을 보호하고 수군이 무사 안녕하도록 지켜주는 군신목(軍神木)으로 신성시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2km 남짓한 걸음에 우리 민족의 강인한 생명력을 느낄수 있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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