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여성, 인간·동물, 정상·비정상… 육체의 경계 점점 무너진다

박동미 기자 2024. 9. 4.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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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展
구사마 야요이 퍼포먼스 영상
김혜순 詩 그린 윤석남 회화 등
11개국 60팀 130개 작품 선봬
주체-대상 사라지는 감각 경험
다나카 아쓰코의 기념비적 회화 ‘지옥의 문’(1965∼1969). 설치 작품 ‘전기 드레스’의 스케치를 수년에 걸쳐 발전시켜 완성한 그림이다.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집요한 물방울과 무한 그물 무늬로 잘 알려진 구사마 야요이. 그가 망과 점의 형태를 강박적으로 그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1967년 제작된 23분짜리 영상 ‘구사마의 자기소멸’은 이를 집약적으로 설명한다. 자신의 신체가 점으로 뒤덮이는 환상을 본 구사마는 점을 찍고 그리기를 반복하다가 몸과 나무, 바위, 고양이, 그리고 도시와 군중이 찍힌 사진 위에도 점을 채운다. 영상은 모든 것이 점으로 뒤덮여 경계가 사라지는 과정이고, 결국 구사마는 ‘점의 세계’를 통해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정상과 비정상의 분리를 거부하고 강하게 의심한다.

구사마 야요이의 영상 스틸컷(1967).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구사마의 기이한 퍼포먼스 영상은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접속하는 몸-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지난 3일 개막한 전시는 구사마를 비롯해 1960년대 이후 활동해 온 아시아 주요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을 대거 조망한다. 가부장제, 국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여성들은 어떻게 ‘몸’을 기억하고, ‘몸’으로 말하며, ‘몸’을 변화시켜 왔는가. 11개국 60여 팀, 130여 점이 이에 답한다. 오사카국립국제미술관, 도쿄도현대미술관, 필리핀·싱가포르·인도 국립미술관 등이 협업한 대규모 기획전이다.

비교적 관람객들이 쉽고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건 1부 ‘삶을 안무하라’이다. 아시아의 복잡한 근현대사 속에서 식민, 전쟁, 이주, 가부장제 등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여성들의 삶의 기억과 경험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김혜순의 시 ‘마녀 화형식’을 해석한 박영숙의 ‘마녀’나 김혜순의 또 다른 시 ‘엄마의 식사준비’를 표현한 윤석남의 회화 등은 사회적 억압과 부조리에 문제를 제기한다. 또한, 1950년대 일본 전위미술 그룹에 속해있던 소수의 여성 작가 중 한 명인 다나카 아쓰코(1932∼2005)의 기념비적 회화 ‘지옥의 문’도 만날 수 있다. 가사 노동에 대한 비판과, 주체적인 여성상에 대한, ‘앞서간’ 여성 작가들의 고민과 철학을 읽어낼 수 있다.

샤오루의 퍼포먼스 기록(2024) 15점 중 4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구사마의 작품들은 2부 ‘섹슈얼리티의 유연한 영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영역이나 이미지를 주로 다룬 섹션으로, 미쓰코 다베의 ‘인공태반’, 아그네스 아렐라노의 ‘풍요의 사체’ 등이 출품됐다. 특히, 주목할 작가는 한국의 이미래와 장파. ‘선배’ 작가들이 1960∼1980년대의 시대상과 개인의 삶에 영향을 받았다면, 1980년대에 태어난 이들은 사회 규범뿐 아니라 문화적 가치에까지 의문을 던진다. 오는 10월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에서 개인전이 예정된 이미래는 불규칙한 폐목재와 거친 질감의 콘크리트를 사용한 ‘봐라, 나는 사랑에 미쳐 날뛰는 오물의 분수:터널조각 1’을 선보인다. 장파의 회화 ‘여성/형상:Mama 연작’은 그림이 관람객을 응시하는 ‘전복적 시선’을 경험하게 한다.

눈여겨볼 만한 또 다른 작품은 ‘반복의 몸짓-신체·사물·언어’(5부) 섹션에서 만날 수 있는 구보타 시게코(1937∼2015)의 비디오와 3차원 조각을 결합한 ‘뒤샹피아나:계단을 내려오는 나부’이다. 모마(뉴욕현대미술관)가 소장한 1976년 작을 작가 사후인 2019년 재제작한 것으로, 한국에서는 이번에 처음 공개된다. 이와 함께, 1970년대 미국과 프랑스에서 활동하다가 30대 초반에 세상을 뜬 한국 작가 차학경(1951∼1982)도 기억해야 한다. ‘눈먼 목소리’라는 1975년 퍼포먼스 사진 속에서 차학경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블루솜 거리에서 프랑스어로 ‘목소리’(Voix)라고 쓰인 띠로 눈을 가렸다. 이주 여성으로서 겪는 ‘언어의 상실’을 표현했다.

윤석남이 김혜순의 시 ‘엄마의 식사준비’를 그리고 쓴 작품(1988).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시는 세대와 장르, 나라와 시대를 뛰어넘어 ‘공명’한다. 다양한 사유와 철학, 집결하는 실험·도전 정신에 충만해지는 전시 후반부, 중국계 호주 작가 샤오루의 ‘15번의 총성…1989년부터 2003년까지’ 앞에 서게 된다. 2003년 10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퍼포먼스 기록으로, 실제로 1989년 작가가 자신의 작품 ‘대화’를 향해 권총을 발사한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총을 쏘는 반복적 행위는 과거의 상처와 억압에 대한 정면 대응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개인적 경험과 정치적 맥락을 반영한 샤오루의 작품은 관객들이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탐구하게 한다. 이번 전시가 “남성과 여성, 주체와 대상, 기술과 신체,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흐리며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열게 되길 기대한다”(전영백 미술사학자)는 바람에 120% 부응하며. 전시는 내년 3월 3일까지, 관람료는 5000원.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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