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보수 세력이 남다른 이유 [하종강 칼럼]

한겨레 2024. 9. 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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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29일 오후 서울 중구 옛 통감관저 터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주최로 열린 경술국치 114년 기억 행사에서 윤석열 정부의 ‘친일·매국 7대 죄상’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본래 ‘보수’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을 가리키는 개념은 아니다. 나라마다 여러 조건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기존의 전통을 중요시하고, 지식을 존중하며, 품위를 갖추고, 예의범절을 지키고, 애국심에 불탄다는 것이 보수 세력의 특징이자 공통점이다.

서양 영화를 보면, 거대한 저택 로비에 가문을 상징하는 조상들의 초상화가 줄지어 걸려 있고 주인이 방문객에게 자랑스레 설명하는 장면이 가끔 나온다. 전쟁에 나가 목숨을 바쳤거나 신체의 일부를 잃은 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나가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다른 나라 보수 가문의 자랑거리이다.

한국의 보수는 좀 다르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이라크전 국군 파견 동의안이 통과된 16대 국회 때만 해도 국회의원 자제들의 병역 면제율은 23.5%로 일반인의 2.5%보다 9.4배나 높았다. 당시 국회 국방위 소속이었던 장영달 의원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4개 재벌 그룹의 2세 병역 면제율은 56.5%로서 일반인보다 무려 22배나 높았다.

한국의 보수 세력이 형성되는 과정은 다른 나라들과 많이 달랐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 중에 순사나 판검사가 된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인 못지않게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다가 혹독하게 고문하며 수사했고 중형을 선고했다. 사실은 더 심하게 한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동족이 더 악랄했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조선인 순사가 일본인 순사보다 더 혹독하게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을 괴롭혔던 이유를 흔히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있다. 이미 그 사람들은 동족들과 거리감이 생긴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배 세력 내에서 일본인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몇배나 더 충성해야 자신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한 현상은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하다가 보수정당에 들어간 정치인의 행태를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본래 보수정당의 정치인보다 훨씬 더 극우적인 발언을 한다. 그래도 정당 내부에서 지지 세력이 별로 많지 않다. 갈수록 그 발언의 강도가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식민지를 겪은 다른 나라들은 해방된 뒤 그러한 사람들을 대부분 감옥에 보내거나 처형했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는 독일에 4년 남짓 점령당했었는데 전쟁이 끝난 뒤 나치 협력자를 색출해 6700여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2만6천여명을 징역형에 처했다. 정치인·언론인·문인 등은 가중처벌했다. 그렇게 했는데도 유럽의 다른 나라들로부터 “과거 청산을 너무 온건하게 했다”는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일본에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점령당했었는데 해방된 뒤 그러한 사람들을 단 한명도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다. 해방이 되자마자 곧바로 분단되는 바람에 과거 청산을 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전쟁을 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군사정부가 30여년이나 집권하는 바람에 식민지 시기의 잘못을 바로잡는 과거 청산의 기회를 거의 완벽하게 상실했다. 동족을 배신하고 점령 세력에 협력하며 출세했던 사람들이 해방 뒤에도 고스란히 살아남아 부와 권력을 축적하고 사회 지배 세력을 형성한 예는 대한민국 외에 찾아보기 어렵다.

영화 ‘더 킹’을 보면 선배 부장검사(정우성)가 후배 신임 검사(조인성)를 타이르는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자존심이나 정의, 촌스럽게 그딴 것 좀 버리자. 역사적으로 흘러가듯 가! 그냥 권력 옆에 있어! 자존심 버려 잡으라고…. 그거 놓치거나 싸워서 잘된 사람 없어. 우리나라 역사에 그런 사람 없어. 친일파며 그딴 놈들 어때? 다 재벌이고 장차관 하고 우리나라 이거야. 독립군들, 한달 60만원 연금 없으면 밥 굶고 살아. 요즘 애들은 왜 역사 공부를 안 하니? 배워야지 역사를!”

한국 사회에서는 그렇게 성공한 사회 지배 세력이 스스로 자신을 ‘보수’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보수’가 다른 나라들의 ‘보수’와 다른 이유다. 다른 나라에서는 도덕적 우월성을 자랑하는 것이 ‘보수’의 덕목이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보수 세력의 도덕성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다른 나라에서도 보수 세력은 기존 체제의 변화를 추구하는 노동운동을 매우 부정적 시각으로 본다. 노동자들의 힘이 커지면 자신들의 몫이 적어진다는 천박한 이해타산도 한몫한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 세력은 그 형성 과정부터가 남다르다. 한국의 피고용자 직장인, 곧 노동자들이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가혹한 노동 탄압에 시달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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