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화폐와 민간화폐가 공존해온 이유

검정색 박쥐우산을 들고 다니는 명탐정, 브라운 신부라는 매력적인 인물을 창조한 영국의 작가 길버트 체스터튼은 “울타리가 본래 만들어진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함부로 제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격언을 남겼다. 사회 제도나 규범 등이 어떤 이유로 확립되었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을 폐지하려는 시도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제도와 규범의 존재 이유를 이해하기 힘든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이 초기에 일관되고 명료한 계획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숱한 시행착오와 혼란을 겪으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다듬어져 왔기 때문이다. 화폐제도도 예외가 아니다. 수천년에 달하는 화폐의 역사를 논외로 하고 최근의 화폐제도에 집중하자면, 시장경제가 발달한 나라들에서는 중앙은행이 만든 화폐와 상업은행이 만든 화폐가 공존한다. 중앙은행의 공공화폐와 상업은행의 민간화폐가 각기 다른 역할을 하면서 공존한다는 점에서 이중화된 또는 계층화된 화폐제도(two-tiered monetary system)라고 불린다.
이중화된 화폐제도의 명과 암
지폐 또는 주화이든 아니면 디지털화된 형태를 취하든 간에, 현대의 화폐는 발행자의 채무증서이며, 발행자가 신용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이를 두고 “은행은 대출을 통해 예금이라는 화폐를 만든다”고 표현하는데, 이러한 원리는 중앙은행 화폐와 민간화폐 모두에서 동일하다. 다만 중앙은행의 공공화폐와 상업은행의 민간화폐 간에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안전한 대출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안전한 화폐이며, 후자는 위험한 대출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위험한 화폐라는 점이다.
원칙적으로 중앙은행은 국채와 같이 신용위험이 없는 안전자산을 담보로 준비금(중앙은행 예치금)이라는 공공화폐를 만든다. 반면 상업은행은 신용위험이 내재된 대출자산을 담보로 예금이라는 민간화폐를 만든다. 상업은행의 대출에는 상당한 자율성이 부여되지만, 중앙은행이 대출해줄 수 있는 대상과 대출방식에 대해서는 법률로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처럼 중앙은행과 상업은행의 화폐가 만들어지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공공화폐와 민간화폐의 장단점도 다르다. 우선 민간화폐의 장점은 경제주체들의 화폐수요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경제주체들의 화폐수요가 바로 대출수요이며, 상업은행은 여신 심사 등을 거쳐 대출함으로써 예금화폐를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민간화폐의 장점은 그 단점과 불가분이다. 상업은행의 대출은 무위험자산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담보로 하는 민간화폐도 안전하지 않은, 위험한 화폐다.
민간화폐인 예금은 지급수단으로 사용되고 유통되는 과정에서 발행은행의 장부를 떠나 타 은행으로 이전될 수 있다. 예금이 발행은행의 채무증서임을 상기하면, 각 은행의 채무증서가 서로 교환됨에 따라 은행 간 거래를 정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여기서 중앙은행이 만드는 공공화폐의 역할이 등장한다.
서로 조응하는 공공화폐와 민간화폐
공공화폐의 장점은 안전자산을 담보로 발행되기 때문에 안전한 화폐라는 점이다. 따라서 중앙은행 예치금의 형태를 취하는 공공화폐는 상업은행 간의 거래를 최종적으로 정산하는 결제수단으로 이용되기에 적합하다. 요컨대 상업은행의 예금화폐가 지급수단으로 사용되고, 중앙은행의 공공화폐가 결제자산으로 기능하는 이중통화제도가 만들어진다.
중앙은행은 결제자산이 부족한 상업은행들에게 대출해줄 수 있지만, 이러한 최종대부 기능의 수행과정에서 신용위험을 부담해서는 안된다는 이른바 ‘중앙은행의 무손실 원칙’은 공공화폐 발행의 특성에서 파생된 것이다. 만약 중앙은행이 신용위험을 부담하면서 화폐를 발행한다면, 그 공공화폐는 안전한 화폐가 아니며, 중앙은행과 상업은행의 기능은 구별되기 어렵다.
민간화폐가 그러했던 것처럼, 공공화폐의 장단점도 동전의 양면과 같다. 안전한 화폐를 만들려면 그만큼의 안전자산이 필요하기 때문에, 공공화폐는 민간화폐만큼 탄력적으로 발행되기 어렵다. 신용위험이 없는 안전자산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안전자산을 담보로 발행되는 공공화폐의 발행에는 제약이 따른다. 그래서 국채 등의 안전자산이 충분치 않으면 공공화폐 발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안전자산에 의존한 발행이라는 공공화폐의 단점은 역사적으로 민간화폐가 출현한 이유였으며, 또한 공공화폐와 민간화폐가 역할을 분담하며 공존하는 현대의 이중통화제도가 성립한 이유이기도 하다. 근대 이후 시장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화폐 사용이 확산되면서, 주요국들은 ‘신뢰할 수 있는’ 화폐를 ‘필요한 만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초기에 신뢰를 위해 채택한 방법은 화폐 발행을 안전자산에 연동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귀금속과 화폐 발행을 연계하기도 하고, 상업은행의 은행권 발행을 아예 금지하거나(1844년 영국), 은행권 발행을 허용하되 국채 보유를 의무화하기도 했다(1863년 미국).
그러나 이러한 방안은 ‘신뢰’를 달성할 수는 있지만, ‘수요’를 충족하기는 어려웠다. 무릇 수요가 있는 곳에는 사업기회가 있는 법, 은행권 발행이 곤란해진 상업은행들은 요구불예금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채무증서를 만들어냄으로써 화폐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현대의 예금화폐가 자리 잡았다. 그렇지만 위험한 민간화폐인 요구불예금의 활성화는 패닉과 금융위기를 야기했고, 이는 안전한 공공화폐를 통해 은행 간 거래를 최종 정산하는 중앙은행제도의 확립으로 이어졌다. 초기 공공화폐의 발행은 금에 크게 의존했으나, 이후 국채 등의 안전자산이 그 역할을 대체하게 되었고, 결국 민간화폐와 공공화폐 모두 ‘대출을 통해 발행’되는 현재의 체제가 자리 잡았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화폐는 발행자의 부채이고, 이 화폐의 가치를 담보하는 것은 당연히 발행자의 자산이다. 그런데 상업은행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또 다른 문제는 자산의 만기가 긴 반면 부채의 만기는 매우 짧다는 점이다. 왜 은행은 사실상 만기가 없는 초단기부채를 보유하는가? 지급수단으로 사용되려면 이용자의 요구에 따라 언제든지 즉시 상환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장기부채는 화폐가 될 수 없다. 그러면 왜 자산을 단기로 보유하면 안되는가? 단기자산을 보유하면 만기 불일치로 인한 문제는 사라지겠지만, 그 단기자산은 또 다른 화폐다. 즉 자산과 부채의 만기를 모두 초단기로 일치시키는 것은, 하나의 화폐를 다른 화폐로 전환하는 것일 뿐, 화폐를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상업은행이 대출을 통해 예금화폐를 만들어내려면 만기 불일치가 불가피하다. 게다가 예금화폐는 위험한 화폐이기 때문에 언제든 패닉의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래서 패닉과 뱅크런을 억제하는 예금보험은 민간화폐의 안정성을 보증하는 장치가 된다.
공공화폐는 민간화폐를 대체할 수 있을까?
20세기 초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민간화폐의 불안정성으로 인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고자 하는 여러 시도가 등장했는데,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이중통화제도에서 민간화폐를 제거하고 공공화폐만 남기려는 시도(내로뱅킹)가 있다. 이렇게 되면 안전자산을 담보로 공급되는 공공화폐가 사회 전체의 화폐수요를 충족해야 한다. 그러나 앞에서 강조했듯이 안전자산은 희소하며, 따라서 이를 담보로 하는 화폐는 충분히 발행되기 어렵다. 게다가 이러한 시도의 실효성도 장담하기 어렵다. 역사적으로도 화폐 발행을 안전자산과 연계하려는 규제가 강화될 때마다, 화폐의 공급부족에 대응하기 위한 또 다른 민간은행, 즉 그림자은행이 등장한 바 있다.
둘째, 민간화폐의 제거에 그치지 않고 공공화폐의 발행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있다. 즉 공적 화폐발행기관이 대출과 무관하게 명실상부한 피아트머니(법정화폐)를 그냥 찍어내는 것이다(주권화폐론). 대출을 통해 화폐를 만드는 방법은 동시에 화폐를 유통시키는 방법임을 감안한다면, 대출과 무관하게 화폐를 찍어내고자 한다면 별개의 유통방법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주권화폐론의 대안은 재정지출과 기본소득 등이다. 그러나 이들은 각각 재정지출 수요와 복지지출 수요를 화폐 수요와 뒤섞는다는 점에서 민간의 화폐 수요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되기 어렵다.
현존하는 이중통화제도는 불완전하고 위험해 보이지만, 민간화폐를 제거하고 공공화폐가 그 기능을 대신하는 방안은 의도와 다른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민간화폐의 과잉공급 등의 부작용을 억제하기 위한 제도 개선은 필요하지만, 만기변환을 통한 민간화폐의 창조는 시장경제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다. 시장경제가 경기변동과 실업이라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보다 좋은 체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하지만 탄력적 공급이 가능한 민간화폐의 약점을 공공화폐가 보완하는 제도가, 오로지 공공화폐만 있는 제도보다 좋은 화폐제도다.
(위 내용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필자가 소속된 기관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임일섭 예금보험공사 예금보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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