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에 정신팔린 사이 공고해지는 '불평등'
문재인 정부 시절부터 '공정'이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한편에서는 '공정'을 비판하고 '평등'을 복권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런 반격은 '공정'론의 밑바탕에 흐르는 능력주의를 이모저모 따지며 비판하는 방향에서 전개되기도 했고, '공정'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한국 사회에서 더욱더 공고해지는 계급 불평등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는 사회학자 조돈문 전 가톨릭대 교수가 <불평등 이데올로기: 수저 계급 사회에 던지는 20가지 질문>(한겨레출판, 2024)을 통해 '평등'이 '공정'보다 더 근본적인 가치이면서 더 시급한 과제임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또한 이 책은 최근에 겉으로 드러난 추세와는 달리 현대 한국인이 꼭 '평등'보다 '공정'을 중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논쟁적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한데 이에 더해, 이런 현재진행형 논쟁에 풍부한 지적 자원과 자극을 줄만한 번역서도 나왔다. 이제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인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평등의 짧은 역사>(전미연 옮김, 그러나, 2024)다. 피케티라고 하면, 이미 우리말로 소개된 두 대표작 <21세기 자본>과 <자본과 이데올로기>가 떠오를 것이다. 앞의 책은 국역본 분량이 800쪽이나 되고, 뒤의 책은 아예 1000쪽이 훨씬 넘는다. 독서 의욕을 원천봉쇄할만한 두께다. 이 점에서 피케티의 새 책은 더욱 반갑다. 제목부터, 평등의 '짧은' 역사가 아닌가. 장벽 하나가 치워진 느낌이다.
짧지만 풍성한, (불)평등의 역사
한데 <평등의 짧은 역사>도 한국 출판계 추세로 보면 그다지 '짧은' 책은 아니다. 300쪽이 조금 넘으니, 사회과학 서적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여전히 적지 않은 분량이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의 깊이와 넓이에 비하면, 확실히 '짧다'. 이 정도 내용을 어떻게 단행본 한 권에 다 담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일만큼 이 책은 평등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를 참으로 풍부하게 전한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은 '추천사'에서 그 미덕을 이렇게 정리한다. "저자가 저명한 경제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경제학'이라는 좁은 테두리에 갇혀 있지 않다는 점", "자본주의에서의 (불)평등 문제의 핵심이 바로 권력관계에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비껴가지 않고 또렷하게 직시한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권력관계에 환원해버리는 또 하나의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이 세 가지에 더해, 불평등에 맞서고 실질적 평등을 이룰 대안으로 "민주적, 생태적, 다원적 사회주의"를 명쾌하게 제시하는 것 역시 장점으로 다가온다(5-10쪽).
<평등의 짧은 역사>를 읽다 보니 과연 이런 특징들이 눈에 들어온다. 깊은 인상을 받은 특징으로 적어도 세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 정말로 짧은지 아닌지를 논외로 한다면, 이 책은 제목에 아주 충실하다. 그야말로 평등의 '역사'다. 근대가 처음 동터오던 시기부터 현재까지 수백 년에 걸친 시간 속에서 (불)평등이 어떻게 장기 변동했는지 간단명료하게 보여준다. 피케티의 방대한 전작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요약정리다.
그리고 여기에서 '역사'란 결코, 알면 좋지만 몰라도 상관없는 상식의 더미가 아니다. 우리가 자신을 알기 위해 반드시 직시해야 할 수단, 하나의 거울이다. 국가나 시장 같은 가장 기본적이면서 거대한 제도들을 둘러싼 사회 세력들의 집단적 결정에 따라 노도와 같은 장기 추세가 형성됐고, 보통사람들의 삶은 8, 9할이 그 흐름에 의해 결정됐다. 자기계발 소재들인 개인의 지능이나 성정, 의지보다는 납세 유권자 선거제와 결합한 초기 산업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느냐, 보통선거제와 결합된 사회국가 시대를 살아가느냐에 따라 삶의 색깔이 정해졌다. 이런 근본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확실히, 주식 가격과 아파트 값 변동에만 골몰하며 살아갈 때와는 다른 눈으로 삶을 바라보게 만든다.
둘째, <평등의 짧은 역사>는 평등의 실로 다양한 얼굴을 아우른다. 물론 뼈대를 이루는 논의는 소득과 자산의 세계사적 변화다. 여기까지는 경제학자가 지은 책에서 누구나 기대할만한 내용이다. 그러나 피케티는 전작, 특히 <자본와 이데올로기>에서 그랬듯이, 이 수준을 넘어선다.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한 분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교육을 별도 주제로 다룰 뿐만 아니라, 성별, 인종 등에 따른 불평등 역시 생색내기 식으로 몇 마디 덧붙이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심도 깊게 짚는다. 흔히 '정체성 정치'와 연관되는 이 주제들이 실은 분배 문제와도 직결된 (불)평등의 또 다른 측면임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특히 의미심장하게 읽은 것은 "제4장. 배상의 문제"다. 이 장에서 피케티는 식민지 노예제의 과거가 현재 자본주의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에 나타나는 심대한 불평등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를 프랑스와 아이티의 관계를 사례 삼아 검증한다. 피케티의 논의는 주변부 사회의 여러 양상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식민주의 문제를 기껏해야 여러 요인 중 하나로 얼버무리는 주류 발전경제학과는 딴판이다.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식민주의라는 핵심으로 육박하고, 총배상액이라는 형태로 그간의 모순을 깔끔하게 집약한다. 제국주의를 반성하려면, 이쯤은 해야 한다.
셋째, 홍기빈 소장도 '추천사'에서 강조하듯이, <평등의 짧은 역사>는 단순한 '경제학자'의 저서가 아니다. 오늘날 보기 드문 인간 유형인 '사회과학자', '사회사상가'의 작품이다. 익숙한 초역사적 경제 모델을 만사에 들이밀기는커녕 역사라는 캔버스 안에 경제, 정치, 사회, 문화 같은 인간 삶의 필수적 측면들을 총출동시킨다. 이것은 단지 경제학자가 다른 분야에도 해박하다는 정도가 아니다. '경제학자'라는 강제적 규정을 넘어 삶과 사회, 세계를 총체적으로 바라본다는 본래의 '사회과학'을 실현한 결과다. 또한 이것이, 특히 <자본과 이데올로기>가 나온 이후에 주류 경제학자들이 피케티를 그토록 경원시하거나 무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경제 바깥 영역에 접근하는 저자의 자세가 이러하기에 <평등의 짧은 역사>는 좁은 의미의 경제를 넘어선 주제에서도 이 책만의 독창적 통찰을 선사한다. 나는 무엇보다 사회국가(국역본은 '사회적 국가'라 옮겼다)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논의에서 이를 확인했다. 물론 사회국가의 주된 수단이자 기능인 누진적 조세제도는 <21세기 자본>부터 피케티가 깊이 파고들고 정열적으로 설파해온 주제다. 한데 평등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짚고 더 나아가 미래까지 전망하는 이런 '역사' 안에 사회국가와 조세제도 논의를 배치하니, 그 함의가 더욱 깊게 다가온다.
탈자본주의의 출발점 – 조세재정국가의 진화
피케티는 사회국가(복지국가)를 조세재정국가라는 보다 일반적인 국가 형태의 진화 속에 자리매김한다. 모든 국가는 고대부터 어떤 식으로든 조세제도에 의존했지만, 실제로 세수가 국민소득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국가는 비교적 최근에야 등장했다. 적어도 유럽의 경우는 그렇다. 동아시아에서는 훨씬 일찍부터 원시 조세재정국가라 할 만한 형태가 등장했지만, 유럽에서는 18세기나 되어서야 조세재정국가 체제가 완비됐다. 다만 유럽의 조세재정국가는 처음부터 발달한 화폐경제와 결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기계제 산업과 결합했기에 처음부터 그 현재적, 잠재력 역량이 막강했다.
18세기-19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조세재정국가의 1차 도약이 전개됐다. 국민소득의 1-2%에 불과하던 세수가 6-8%로 증가했다(173쪽). 다만 이때 증가한 재정은 관료제의 뒤늦은 확대와 전 세계를 들쑤시고 다닐 군사력 확충에 투입됐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신자유주의 등장 직전까지의 시기에 조세재정국가의 2차 도약이 나타났다. 유럽 주요국들의 경우, 세수가 국민소득의 40-50%로까지 급증했고, 대폭 늘어난 재정은 이제 교육과 의료, 교통과 공동체 인프라, 각종 복지제도에 주로 사용됐다(168쪽). 이렇게 2차 도약을 거친 조세재정국가가 바로 사회국가다.
말하자면 피케티는 조세재정국가의 좀 더 긴 진화 과정 안에서 사회국가의 출현과 발전을 바라본다. 유럽과 북미에서 조세재정국가가 등장해 발전하다가, 불평등, 특히 계급 불평등에 대한 격렬한 항의와 이에 따른 보통선거제 민주주의의 출현을 통해 조세재정국가의 더 진화된 형태인 사회국가가 대두했다는 것이다.
피케티의 이런 조세재정국가-사회국가론은 사회주의운동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이 운동을 분열시킨 첨예한 논쟁 구도에서 개혁적 사회주의, 즉 '사회민주주의'에 속했던 이들이 실제 역사 속에서 해온 일이 무엇이었는지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개혁주의자들이 부르주아계급의 역사적 산물인 현존 국가를 계승한다는 점을 호되게 비판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을 계승했고 심지어는 더 발전시켰는지 따져봐야 한다. 개혁주의자들은 이제 막 2차 도약에 나서려던 조세재정국가의 중앙권력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2차 도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 결과로 등장한 사회국가는 그러니까 애초 혁명주의자들이 비판 대상으로 삼았던 역사적 부르주아 국가를 일정하게 초과하는 셈이다.
피케티가 제시하는 "민주적, 생태적, 다원적 사회주의"는 이런 조세재정국가-사회국가의 역동적, 복합적 진화 과정에 바탕을 두며, 신자유주의와 벌일 대결의 결과에 따라 사회국가가 미래에 더욱 확대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렇다고 피케티가 20세기형 사회민주주의의 단순한 부활이면 충분하다는 순진한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결론을 이어받아 <평등의 짧은 역사>에서도 "소유의 재분배만으로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강조한다. 소유 구조를 변혁해야 하며, 그러려면 생산과 서비스가 이뤄지는 현장, 즉 기업에서 권력관계가 바뀌어야 한다. <평등의 짧은 역사>는 이를 위해 1970년대 스웨덴의 임노동자기금 구상을 새롭게 다시 추진하는 방안까지 제시한다(220-223쪽).
이 대목에서 탈자본주의 이념-운동의 오랜 난제인 개혁과 혁명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조세재정국가의 2차 도약이 이뤄지기 전인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개혁 대 혁명 논쟁의 주된 내용은 의회민주주의의 수용 여부를 중심으로 기존 국가를 이어받을 것인가, 단절할 것인가로 나타났다. 하지만 사회국가의 등장과 발전, 후퇴까지 한 차례 경험한 역사적 상황에서 피케티가 제시한 도식에 따르면, 개혁과 혁명의 문제는 조세재정국가-사회국가를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키는 과제와 이런 사회국가 확대만으로는 자동으로 실현될 수 없는 기존 권력관계의 역전이라는 과제를 어떻게 결합할 것이냐는 고민으로 재정리될 수 있다. 이 경우에 두 과제의 관계는 더 이상 대립이나 양자택일이 아니라 공존과 중첩, 시너지다.
물론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경로는 단 하나일 수 없다. 아니, 각 사회가 밟을 경로는 과거보다 훨씬 더 다양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머레이 북친의 지역자치적 코뮌주의(<착취 없는 세계를 위한 생태정치학>, 서유석 옮김, 동녘, 2024)에서 영감을 얻은 쿠르드 자치정부의 로자바 혁명처럼, 조세재정국가-사회국가의 진화 과정을 반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경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조세재정국가-사회국가의 역사적 경로가 열린 사회(한국 같은)에서는 피케티가 제시한 탈자본주의론의 기본 구도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지속적인 확대와 활성화를 통해 조세재정국가-사회국가를 복구하거나 새로 구축하거나 확장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계급 세력 관계를 실질적으로 역전시키는 도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피케티도 지적하듯이, 21세기에 사회국가를 성장시키는 힘은 무엇보다 기후위기와 인구/돌봄위기 대응에서 나올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최대 과오 - 조세재정국가의 후퇴와 역량 훼손
하지만 생각을 이렇게 굴려가다 보면, 우리의 현재가 더 답답해진다. 윤석열 정부의 실정에 관해서는 이미 지겨울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느닷없는 '공산전체주의'에 대한 선전포고부터 핵발전소 복고주의, 정파적 목적에서 시작된 의료 파국, 모험적인 대북 강경 기조와 교조적인 한미일 군사동맹 맹신, 이를 위한 뉴라이트 역사관 맹종까지 지면이 모자랄 정도다.
한데 그 중에서 정말 심각한데도 그만큼 주목을 받지 못하는 과오가 있다. 부자 감세를 통한 조세재정국가 역량의 심각한 훼손과 후퇴가 그것이다. 대한민국의 국가기구는 오랫동안 조세재정 역량이 국내 자본주의 발전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감세국가'(김미경, <감세국가의 함정>, 후마니타스, 2018) 기조를 이어왔지만, 그래도 윤석열 정부 전까지는, 심지어는 박근혜 정부도 기존 역량을 후퇴시키는 짓까지는 차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 일이 벌어지고 있다.
<평등의 짧은 역사>를 읽으며 확인한 것처럼, 조세제도는 단지 현대 국가의 여러 정책 영역 중 하나가 아니다. 현대 국가의 요체인 조세재정국가의 존립과 재생산을 위한 기본 토대다. 그리고 피케티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사회 개혁(심지어는 혁명까지도)이 출발할 원점이다.
윤석열 정부는 지금 이 싹을 짓밟고 있다. 과거와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가 수탈당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재정 실패에 대해 더 많이 주목하고 더 많이 공격하며 더 많이 투쟁해야 할 이유다.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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