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 칼럼] 오염된 시민사회, 고장난 담론시장
과학·이성이 '떼'에 굴복한 격
자정기능 상실한 시민사회 자화상
학계·언론이 가짜 뉴스 방치·조장
법리 무시한 상법개정도 같은 맥락
나쁜 정치 막아낼 집단지성 절실
백광엽 논설위원
‘후쿠시마 오염수 사태’가 괴담 목록에 추가될 조짐이다. ‘방류 7개월 뒤 제주 앞바다부터 망가질 것’이라는 공포 마케팅이 극성이었지만 남해는 1년이 지나도록 푸르다. 동해 쪽빛도 변함없다. 해양 생태계 붕괴를 외치던 선동가들은 실없는 변명에 급급하다. “5년 뒤, 10년 뒤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른다”고.
무한 반복되는 괴담은 고장 난 한국 담론시장의 현주소다. 일본 방류에 극렬 반대하는 전문가는 극소수다. 핵의학 등을 제외한 정통 원자력학계에선 S모 서울대 명예교수가 거의 유일할 정도다. “학계 왕따가 됐다”는 S교수의 말처럼 대부분의 전문가는 ‘방류 안전 기준을 충족한다’고 평가한다. “1L든 10L든 직접 마실 수 있다”는 전문가도 여럿이다. 그런데도 S교수의 ‘나 홀로 견해’가 다수설처럼 회자됐다. 적잖은 언론이 그에게 수없이 마이크를 내주며 학계를 과잉대표하도록 유도한 탓이다. 환경운동가, 시민단체 활동가들도 전문가연하며 가짜뉴스를 쏟아내 힘을 보탰다.
후쿠시마 괴담은 떼의 위세에 과학·이성이 무력하게 굴복한 부끄러운 사건이다. 나아가 견고한 시민사회 부재의 방증이기도 하다. 그람시에 따르면 국가는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두 바퀴로 굴러간다. 시민사회는 학교·종교·언론·사회단체 같은 다양한 시민결사체의 집합이다. 정치사회의 주인공은 정당, 시민사회의 주역은 지식인이다.
한국에서 정치사회의 타락은 상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40여 년 핵연구자인 영국 옥스퍼드대 석학을 “돌팔이 과학자”로 낙인찍은 장면에서 적나라하다. 정치사회가 부패하면 시민사회의 중요성이 더 커진다. 책임감·균형감으로 정치사회를 견제할 의무가 시민사회 주축인 지식인에게 부여된다.
하지만 한국 시민사회는 자발적 복종으로 내달렸다. 오늘 한국이 당면한 문제의 상당 부분은 자정 기능을 상실한 시민사회로 말미암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광우병 사태 등이 대표 사례다. FTA 반대 시위는 좌파적 대안에 경도된 한 줌 진보경제학자들이 불붙였다. 독재자 차베스를 상찬하던 한 공영방송 PD도 편향적 다큐멘터리로 기름을 끼얹었다. 광우병 사태의 구조도 판박이다. W교수 등 몇몇 정파적 학자, “이명박에 대한 적개심”으로 다큐멘터리를 조작한 작가·PD, 생계형 시민운동가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도덕 불감 시민사회와 작동 불능 담론시장은 서민 삶을 직격한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드라이브가 잘 보여준다. 홍장표 부경대 교수가 주창한 소주성은 “북한에나 어울릴 법한 정책”(김병연 서울대 교수)이라며 경제학자 절대다수가 반대한 탁상공론이다. 하지만 ‘주머니가 두둑해질 것’이라는 시민단체들의 선동이 가세하자 어엿한 담론의 지위를 획득했다. 5년 실험의 결과는 예고된 참패였다. 성장과 분배 모두 곤두박질쳤다.
게으른 시민사회, 고장 난 담론시장은 새 먹잇감을 헌납했다. 경제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상법개정이다. 상법상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는 안이다. 최초 주창자인 L모 경북대 교수를 제외하면 이 주장에 찬성하는 법학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소액주주가 지분 이상의 권리를 행사하고, 이사는 주주 눈치 보느라 결정장애에 빠질 개연성이 높아서다.
이런 사정 탓에 관련 세미나가 열릴 때 ‘찬성 토론석’에 앉을 정통 법학자를 한 명도 구하지 못해 모두 경영학자나 증권맨으로 채우는 일이 일상적이다. 명색이 한국 대표 법학자단체인 상사법학회가 내일(5일) 개최하는 ‘상법개정 특별세미나’에서도 같은 장면이 예상된다.
상법개정을 지상과제로 천명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비공개로 주요 대학 법학 교수들을 접촉하며 설득에 한창이다. 1500만 개미투자자의 열광적 호응을 의식한 행보다. 포퓰리즘에 대한 후각이 남다른 야당의 발걸음은 더 잽싸다. 한두 달 새 네 명의 의원이 경쟁하듯 상법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상법 개정을 넘어 소액주주에게 포괄적 우대권을 부여하는 특혜성 입법도 가시화됐다.
만개한 플랫폼 시대는 진실을 ‘제작’해 군림하려는 선동가들에게 최적의 환경이다. 이들의 그릇된 욕망을 저지하는 일이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부여된 소명이다. 시민사회의 대오각성이 없다면 괴담의 무한 반복과 나쁜 정치의 무한 폭주는 예정된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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