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휘의 재계 인사이드] 38년 묵은 규제에 목매는 공정위
1986년 도입된 ‘동일인 지정제’의 영어 표현은 ‘same person designation system’이다. 한글로 다시 번역하면 ‘같은 사람 지정하기 제도’다. 영미권 사람은 물론이고 한국 사람조차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를 이 희한한 제도를 공정거래위원회는 38년째 고수하고 있다.
사실 동일인 지정제는 영어로 번역할 수 없다. 한국에만 있는 제도여서다. 미국에서 굳이 비슷한 제도를 찾는다면 ‘ultimate beneficial owner’(최종 수혜자) 지정제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최종 수혜자 지정제는 목적이 완전히 다르다. 이 규제는 기업이나 법인의 실질적인 소유자를 식별함으로써 자금 세탁과 테러 자금 조달을 방지하는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1987년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있던 해다. 민주화 물결 속에 정부와 국회는 당시 ‘재벌’의 ‘경제 권력’ 집중을 막기 위해 동일인 지정제를 도입했다. 대기업 집단의 실질적인 지배자를 총수로 지정하고, 총수와 그 주변 친인척의 경제 행위 일거수일투족을 공정위에 매년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함으로써 부정행위를 예방하겠다는 취지였다.
코미디 같은 궤변과 요식
1986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3000달러 정도였다. 지금의 베트남보다 가난하던 시절이다. 1986년 이후 38년간 한국이 겪은 변화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빨랐고, 상전벽해라고 할 만큼 변화 폭도 컸다.
세상은 바뀌었지만, 공정위는 요지부동이다. 38년 묵은 낡은 규제를 국민소득 4만달러를 넘보는 시대에 적용하니 곳곳에서 드러나는 모순이 땜질 처방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지경이다. 에쓰오일, 쿠팡, 한국GM 등 자산 5조원이 넘는 외국 기업에 대해 동일인을 사람이 아닌 법인으로 지정토록 예외를 두기로 한 것은 ‘코미디’다. ‘쿠팡그룹을 지배하는 자는 쿠팡이다’라니, 이 무슨 동어반복이고 궤변이란 말인가.
시효가 다한 제도를 없애면 간단히 해결될 일을 공정위가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면서 글로벌 경영 시대에 웃지 못할 해괴한 일도 벌어지고 있다. 공정위는 동일인 관련 공시 자료를 제출할 때 반드시 총수의 인감 날인과 함께 자필 서명을 받도록 하고 있다. 매년 거의 동일한 자료에 구태여 그룹 총수가 해외 출장 계획까지 조정해가면서 서명하도록 강제한 건 공정위의 권력 과시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정부는 '큰 칼'을 잘 써야
황당한 계열 편입 사례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공정거래법 시행령 제4조는 사외이사가 투자한 기업도 대기업집단 계열사에 넣도록 했다. 예컨대 업계 경험이 풍부한 기업인이 대기업집단 계열사의 사외이사에 선임된 이후 스타트업에 투자했다면, 해당 스타트업은 졸지에 대기업 계열사로 분류돼 매년 공시 서류의 홍수에 파묻혀야 한다. 대기업들이 법조인이나 교수, 혹은 전직 관료 외에 경영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유능한 기업인이나 금융인을 사외이사진에 넣는 방향으로 혁신을 꾀한다고 해도 이런 보이지 않은 규제에 가로막힐 수 있다는 얘기다.
특정 집단이 국가의 부를 좌지우지하는 행위는 나라의 토대를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근절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 국가나 포퓰리즘 정부는 정국에 변화를 주기 위해 경제 권력 견제를 명분으로 경제인을 희생양으로 삼곤 했다. 1986년의 우리 사정도 비슷했다. 하지만 이제 선진국 한국의 ‘경제 권력’ 감시 방법은 선진화될 필요가 있다.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등에선 빅테크의 독과점 위험 정도를 제외하면 시장의 감시에 상당 몫을 맡긴다. 수백조원의 자산을 굴리는 국민연금을 비롯한 기관투자가, 이들의 돈을 받아 움직이는 사모펀드, 자산운용사 등 자본시장의 눈을 피해 총수가 사익 편취 행위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공정위의 고집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동일인 지정제를 없애면 공정위 조직의 절반이 날아갈 것이다”. 공정위는 이런 오해를 언제까지 감수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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