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질 돌아올 때까지 집에 안가” 이스라엘 노숙 시위
“전쟁 고집 네타냐후 물러나라”
3일 오전 찾은 이스라엘 텔아비브 도심의 하비마 국립극장. 1945년 건립돼 이스라엘 문화를 상징하는 장소로 꼽히는 극장 건물 앞에 30여 개의 텐트가 늘어서 난민촌처럼 변해 있었다. 젊은 여성부터 턱수염을 기른 남성, 백발이 성성한 주름진 노인까지 수십 명의 얼굴 사진을 담은 현수막도 걸려 있었다.
하나같이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사진 속 인물들은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 팔레스타인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인질들이다. 히브리어로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나도 집에 가지 않겠다’고 적힌 팻말도 세워져 있었다. 주말이면 연극을 보러 오는 관객들로 북적이는 거리가 이렇게 바뀐 건 지난달 31일부터다. 11개월째 억류된 인질들의 송환을 기원하며 30여 명이 노숙 시위를 시작했다.
이튿날인 1일 인질 여섯 명이 가자지구 라파의 지하 터널에서 참혹하게 살해된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곳은 대규모 반정부 시위의 주요 구심점이 됐다. 이날 이스라엘 총인구의 7%에 달하는 70만명이 전국에서 반정부 시위에 동참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그중 55만명이 최대 도시 텔아비브 거리를 점령하고 조속한 인질 석방과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일부는 총리 관저 앞까지 몰려갔다. 과거 내부 정쟁(政爭)을 벌이다가도 외적의 침공을 받으면 똘똘 단합했던 이스라엘 특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텐트촌을 지키던 중년 여성 아이리스 밀너가 “정부에서 버려진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인질들이 모두 돌아올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텔아비브대 교수라고 소개한 그는 “인질뿐 아니라 의미 없는 전쟁을 계속해야만 하는 군인들과 피란민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밀너와 함께 사흘째 텐트에서 숙식 중인 동료 교수 우리 아셔리는 “시위 참가자 대부분이 어린 학생들인데 교수들도 가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거리로 나왔다”면서 “이렇게 해도 네타냐후는 인질 석방에 관심이 없고 시민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고 했다.
현 정부에 대한 이스라엘인의 정서는 거리마다 붙여놓은 구호에 응축돼 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비정한 지도자 네타냐후를 기리는 거리’다. 텐트촌에서는 도로 표지판을 본뜬 구조물을 만들어놓고 이를 쓰러뜨리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이날 텔아비브에서 만난 이스라엘인 대부분은 “인질 송환이 늦어지는 상황에 분노해서 자발적으로 반정부 시위에 동참했다”고 말했다. 자영업자·회사원 등 직업도 다양했다. 여자친구와 양가 부모 등 가족들이 모두 시위에 참가했다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오셰르 지젬스키는 집권 세력을 향해 날을 세웠다. “세계가 가자지구의 난민들만 바라보지만 먼저 공격당한 것은 이스라엘이고 우리 군인과 아이들도 똑같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받지 않고 있어요. 그런데 네타냐후는 자기 정권 지키기에만 신경 쓸 뿐 인질 협상과 종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전쟁을 멈추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 모두 집으로 돌아오는 것뿐이에요.”
텔아비브 곳곳에서 분노와 좌절의 흔적을 찾는 게 어렵지 않았다. 거리마다 네타냐후를 비난하는 현수막과 스티커들이 나붙어 있었다. 이틀 전 몰려든 시위 인파로 발 디딜 틈 없었던 국방부 청사 앞 4차선 차도와 육교에는 페인트로 인질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고, 인질 송환을 기원하거나 네타냐후의 퇴진을 요구하는 포스터들이 나붙었다. 인질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노란 리본을 그라피티처럼 그려놓기도 했다.
시민 휴식 공간인 디젠고프 광장 분수대에서는 빼곡하게 들어찬 인질 사진과 양초 가운데 큼지막한 곰 인형이 보였다. 부모 품에서 떨어진 어린 인질들을 위해 시민들이 가져다 놓은 것이다. 공원에서 만난 톰 콘블릿은 “납치된 이들을 잊지 않기 위해 지역 학생들이 합심해서 공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전쟁은 지난해 10월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해 주민 1200여 명을 살해하고 250여 명을 인질로 끌고 간 뒤 이스라엘이 즉시 보복에 나서면서 시작됐다. 전쟁 발발 1주년을 한 달 앞둔 시점에, 납치 인질들의 송환 여부가 걸려 있는 휴전 협상은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 네타냐후 정권은 하마스 격멸을 외치지만 전황은 교착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중이다. 이 같은 악순환 속에 들려온 인질 여섯 명의 살해 소식은 이스라엘인들의 분노와 좌절에 기름을 부었다. 특히 이들이 이스라엘군이 진입하기 48~72시간 전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는 이스라엘 당국의 발표는 분노의 화살을 하마스가 아닌 내부로 돌리게 했다.
이스라엘 최대 노동조합인 히스타드루트가 “정부가 신속하게 휴전 협상에 나서도록 압박하겠다”며 총파업을 선언하면서 항공 관문인 벤구리온 국제공항의 운영이 한때 중단되고, 이스라엘 경찰이 팔레스타인이 아닌 자국민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물대포나 섬광탄을 동원하는 모습도 이전에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대규모 시위는 일단 잦아들었지만, 인질들이 살해 전 극한의 상황에 내몰렸던 정황이 속속 알려지면서 이스라엘의 분노와 좌절은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하마스는 2일 텔레그램 채널에 이번에 희생된 인질들이 각자 이름을 말하는 모습 등을 담은 45초 분량의 동영상을 공개하면서 추가 인질 살해를 위협하고 이스라엘에 휴전 협상을 압박했다.
전례없는 민심 악화 속에서도 네타냐후는 하마스 격퇴전 강행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2일 기자회견에서 “인질 석방을 위해 나만큼 노력하는 사람이 있나. 누구도 나에게 설교할 수 없다”며 “가자지구에 이스라엘군은 전략적으로 반드시 주둔해야 한다”고 했다. 이스라엘군이 가자에서 철수해 휴전 협상의 물꼬를 터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요구를 일축한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네타냐후가 인질 협상을 위해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고 보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아니다”라고 단언하며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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