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할 것이냐, 말 것이냐’ 셰익스피어 운율 살려 번역한 30년
셰익스피어 전집 10권으로 완역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는데, 백문이 불여일청! 한번 들어보세요. 오 로미오, 로미오, 왜 그대는 로미오인가요….”
30여 년에 걸쳐 영국 대문호 셰익스피어(1564~1616)의 작품 전부를 우리말로 번역한 최종철(75) 연세대 영문과 명예교수가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장면 대사를 읊었다.
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서 열린 최종철 교수의 ‘셰익스피어 전집 10권’(민음사) 완간 간담회 자리. 1993년 ‘맥베스’ 번역을 시작으로 비극 10편, 희극 13편, 역사극과 로맨스 외 15편, 시 3편, 소네트 154편 등 총 5824쪽 분량을 10권 전집으로 묶었다. 앞서 2014년에 먼저 5권을 냈고, 지난달 나머지 5권을 냈다. 30여 년의 대장정을 마친 셈이다.
셰익스피어 극은 운문이 전체 대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운문 대 산문 비율이 ‘햄릿’은 75대25, ‘오셀로’는 80대20, ‘맥베스’는 무려 95대5에 달한다. 산문은 주로 희극적인 분위기나 신분이 낮은 인물, 저급한 내용, 편지나 포고령, 또는 정신 이상 상태를 드러낼 때 쓰인다. 운문으로는 격식을 갖춰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다. 예컨대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에서 리어왕의 대사는 운문과 산문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그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다.
그의 번역은 뜻깊다. 그간 산문 투로 번역되던 셰익스피어 작품 전부를 우리말의 운율을 충분히 살려 옮겼기 때문이다. 원래 운문으로 쓰인 대사를 산문으로 바꾸면 운문 특유의 함축성과 긴장감, 리듬감 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운율이 살아있으면 잘된 번역입니다. 뜻과 소리가 조화를 이루는지는 읽어보면 알아요.”
최 교수는 우리 시의 기본 운율인 3·4조를 적용해 셰익스피어의 ‘약강 오보격 무운시’를 우리말로 번역했다. 약한 음절과 강한 음절이 시 한 줄에 연속적으로 다섯 번 나타나고(’약강 오보격’), 연이은 두 시행의 끝에서 같은 음을 되풀이하지 않는(’무운’) 형식이다. ‘리어왕’의 “Nothing will come of nothing”은 “없음은 없음만 낳느니라”로 운율을 살렸다. 또 ‘베니스의 상인’의 유명한 구절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Often have you heard that told’는 “빛난다고 다 금은 아니다/ 그런 말을 여러 번 들었겠지”로 리듬감 있게 옮겼다.
셰익스피어 작품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건 1923년 무렵. 영어에서 일본어로 번역된 작품을 다시 한국어로 옮긴 것이기에 산문 투 번역이 100년 넘게 굳어졌다는 게 최 교수의 분석이다. “영어라는 소리 글자를 한자·히라가나·가타카나로 시행의 길이를 맞춰서 옮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그 당시 지식인들이 셰익스피어 작품을 ‘해외 직구’했으면 어땠을까(웃음). 운문 투 번역이 이뤄졌을 수도 있겠지요.”
자신이 꼽은 ‘잘한 번역’ 중 하나는 ‘햄릿’의 문제적 대사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그는 이를 “존재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다”로 옮겼다. 주로 ‘사느냐 죽느냐’로 옮기는 경우가 많지만, 생사의 직설적인 선택으로 옮기는 것은 미흡하다고 판단했다. “햄릿이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장면이지 생사의 문제로 긴박한 상황이 아니에요. 복수감에서 많이 떨어져서 관조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be’라는 굉장히 일반적인 단어를 쓴 거죠.” 앞서 최 교수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는 이를 “있음이냐 없음이냐”로 번역했는데 한국어의 ‘있음’과 ‘없음’에 역사적·철학적·언어학적 무게가 충분히 실리지 않았다고 판단해 ‘존재’라는 묵직한 한자어를 넣었다.
연세대 영문과 3학년 재학 중 ‘셰익스피어’ 강의를 들은 것이 시작이었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있을 수 있나’ 감탄했다. 그는 “언어의 힘은 물론 불편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능력에 이끌렸고, 이것이 앞으로 내가 갈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이후 30년간 한 프로젝트에 매진하게 될 줄은 몰랐다. 힘에 부쳐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없을까. “당연히 있죠. 하지만 엄청나게 기쁜 순간들이 있습니다. 진실에 접속하는 순간이 셰익스피어 희곡이 주는 기쁨이지요.”
가장 어려웠던 작품은 “밀도가 가장 높은 ‘맥베스’”라고 했다. 꼬박 3년이 걸렸다. “살인자지만 셰익스피어의 인물 중 가장 시적인 인물입니다. 비유와 상징이 많고, 아주 짧아요. 엄청나게 압축된 문장이 전광석화처럼 지나갑니다.” 비유와 상징으로 압축된 시적인 작품을 설명 조로 옮기면 “위스키 마시다 갑자기 맹물 마시는 격”이라고 했다.
400년 전의 작품이 여전히 유효한지 묻자 최 교수가 싱긋 웃었다. “인간 본성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거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을 만들어내는 게 셰익스피어 천재성의 핵심이지요.” 최 교수는 “세상은 셰익스피어를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으로 나뉜다”고 했다. “셰익스피어를 읽은 사람에게는 내면의 변화가 반드시 찾아옵니다. 언제 어디서 찾아올지 모르지만 읽다 보면 ‘야! 이런 거구나’ 하는 순간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최종철 교수(75)
국내 셰익스피어 권위자. 1989년 모교 연세대 영문과에 교수로 부임했고, 2014년 정년 후 현재는 명예교수다. 셰익스피어와 희곡 연구를 바탕으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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