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지침’ 실존 인물 김주언·오세혁 작가 “운동이 된 연극…‘말의 힘’에 대한 책임 느껴야” [인터뷰]

2024. 9. 3.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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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보도지침’ 폭로 실존 인물 김주언
오세혁 극작 연극 ‘보도지침’ 8주년 맞아
1986년 ‘보도지침’ 폭로 사건 다룬 연극 ‘보도지침’의 실존 인물 김주언 전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왼쪽)과 극본을 쓴 오세혁 작가. [마포문화재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신문사로 아침마다 팩스가 날아옵니다. 그 팩스에는 이런 지시문이 써있습니다. 그 기사는 보도하지 말 것. 그 기사는 작게 보도할 것. 그 기사는 꼭 1면에 실을 것. 그 기사는 그 단어를 뺄 것. 그 기사는 그 단어를 넣을 것.” (연극 ‘보도지침’ 대사 중)

매일 아침 ‘지시적인 어휘’로 채워진 ‘보도지침’이 담긴 팩스 한 장이 신문을 통제하던 시대가 있었다. 젊은 기자 김주혁(‘보도지침’ 속 주인공)은 법정에 선다. 장장 10개월간 모아온 584건의 ‘보도지침’을 차곡차곡 엮어 폭로한 ‘죄’를 묻는 자리. 전두환 정권 시절 보도지침 폭로 사건을 다룬 연극 ‘보도지침’(9월 8일까지, 마로아트센터)의 한 장면이다.

연극은 타임슬립 하듯 여러 과거와 현재를 쉴새없이 오간다. ‘보도지침’의 도화선이 된 사건의 사례로는 법정에서부터 3개월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다. 같은 해 6월, 경기도 부천경찰서에서 벌어진 권인숙(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성고문 사건을 가져온 대목이다. 조명 하나가 덩그라니 켜진 무대.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는 후배 기자 김주혁을 마주한 편집국장이 어르고 달래듯, 답답한 심경을 부여잡다 결국 안면몰수하고 묻는다.

“정말 몰라서 묻나? 여대생이 성희롱 당한 정도의 사건을 1면에 실을 만큼 세상에 뉴스가 없어?” (편집국장 대사 중) 굽히지 않는 후배에게 편집국장은 ‘균형’을 맞추라며 ‘조건’을 단다.

‘오늘 오후 4시 검찰이 발표한 조사결과 내용만 보도할 것. 사회면에서 취급할 것(크기는 재량에 맡김). 검찰 발표문 전문은 꼭 실어줄 것. 이 사건의 명칭을 성추행이라 하지 말고 성모욕행위로 할 것. 발표 외 독자적인 취재보도 내용 불가. 시중에 나도는 반체제 측의 고소장 내용이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여성단체 등의 사건 관계 성명은 일체 보도하지 말 것.’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관련 실제 ‘보도지침’ 내용)

1986년 ‘보도지침’ 폭로 사건 다룬 연극 ‘보도지침’ [마포문화재단 제공]

올해로 다섯 번째 시즌을 맞는 연극 ‘보도지침’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 실제로 있었던 ‘보도지침’ 사건을 다룬다. 연극 속 김주혁의 실제 주인공은 김주언(70) 전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 그는 한국일보 재직 시절이던 1985년 10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각 언론사에 시달된 지침들을 월별로 한 부씩 모아둔 문서철을 복사해 정부의 ‘언론 탄압’ 행태를 낱낱이 폭로했다. 해직언론인 단체인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발행하는 월간 ‘말’지를 통해서다. 그 해 9월 ‘말’지는 특집호를 통해 ‘보도지침-권력과 언론의 음모’ 8000부를 찍었다. 이 기간 정부가 ‘강제한’ 보도지침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보도불가’였다. 기사 크기도 세세하게 통제했다. ‘조그맣게’, ‘조용히’, ‘너무 흥분하지 말고’, ‘돋보이게’, ‘균형있게’ 라는 다채로운 표현을 총동원했다.

“부국장이 날마다 전화로 내려오는 지시를 받아쓰고, 그 내용을 복사해 주요 부서 부장에게 전달했죠. (보도지침을) 지키지 않으면 많은 경우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언론가 사주에겐 신문사 등록을 취소하겠다는 협박이 일상적이었어요.” (김주언 전 뉴스통신위원회 이사장)

최근 마포아트센터에서 만나 함께 연극을 관람한 김주언 전 이사장은 그 시대를 이렇게 떠올렸다. 당시 그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법정에 선 그에게 더해진 ‘죄목’은 국가보안법 위반, 외교상 기밀누설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국가 모독죄.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그는 1995년 12월이 돼서야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1986년 ‘보도지침’ 폭로 사건 다룬 연극 ‘보도지침’의 실존 인물 김주언 전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과 극본을 쓴 오세혁 작가. [마포문화재단 제공]
“‘아차’ 싶었던 두려움…언론의 기사와 배우의 독백이 다르지 않아”

만천하에 폭로됐음에도 ‘보도지침’으로 인해 ‘보도지침 폭로 사건’은 보도되지 않던 시절, 하지만 세상을 발칵 뒤집었던 ‘사건’, 그로 인해 1987년 6월 항쟁의 불씨를 지핀 이날들의 이야기는 2016년 무대로 옮겨졌다.

연극의 극본은 오세혁(43) 작가가 썼다. 1981년생인 그는 “초연을 연출한 변정주 감독에게 작품을 제안받았을 당시엔 무조건 하겠다고 하면서도 사실 ‘보도지침’이라는 네 글자를 검색해보기 전엔 이 사건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며 “사건을 검색해보니 ‘아차’ 싶었고, 두려워졌던 것도 사실이다”라고 했다. 변정주는 박근혜 정권 말기 ‘촛불집회’를 연출한 주인공이다.

오 작가가 작품 집필을 의뢰받은 때는 2015년이다. 그는 “대본을 쓰기 시작하던 때가 (김주언) 선생님과 비슷한 나이대였고, 사건을 공부하며 이 이야기로 연극을 만들지조차 못하면 내가 연극을 할 이유가 있을까 싶어 용기를 내게 됐다”고 돌아봤다.

연극으로 태어난 ‘보도지침’은 실제와 허구를 유연하게 오간다. 보도지침을 폭로한 월간지는 ‘말’에서 ‘독백’으로 이름을 바꿨다. 극중 김주혁 기자와 월간지 ‘독백’의 편집장, 이들을 대리하는 변호사와 맞서는 검사는 모두 같은 대학 연극부 출신으로 설정했다. 김 전 위원장 역할의 김주혁은 탈춤반에 가려다 연극반에 들어가게 됐다. 실제로 김 전 위원장은 대학 시절 탈춤반이었다. 오 작가 역시 대학 때 풍물패였다고 한다.

희곡에서의 ‘연극반’ 설정은 무대 위 연극 배우들에게 ‘동기 부여’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오 작가는 “초연 당시가 워낙 엄혹했던 시기라 이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들에게 동기부여를 주면서도 각자의 삶과 접점이 있으면 좋겠다고 판단했다”며 “언론과 배우들의 연기가 닮은 점은 모두 자신들이 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언론의 기사와 법정에서의 연설, 무대 위 독백이 다르지 않다고, ‘말의 힘’에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1986년 ‘보도지침’ 폭로 사건 다룬 연극 ‘보도지침’의 실존 인물 김주언 전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 [마포문화재단 제공]

김 전 위원장은 “‘보도지침’이 가진 언론통제에 대한 고발만 훼손하지 않는다면 극 자체에 대한 것은 온전히 예술가의 영역이기에 얼마든지 각색할 수 있다고 봤다”며 “같은 연극반 출신 동기와 선배라는 설정을 통해 관객들이 보다 재밌고 실감나게 볼 수 있는 지점이 마련됐다”고 했다.

‘보도지침’ 무대를 통해 오 작가와 배우들은 연극의 존재 이유와 가치에 대한 고민을 꺼내놨다. “연극은 진실을 말하는 것”에서 시작되며, 이렇게 만들어진 ‘연극은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라는 가치를 다시 세우고자 한 것이다. 오 작가는 “2016년 당시 연극계는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대다수의 창작진 사이에 자괴감이 커졌다”며 “‘연극은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다’라는 말은 서울연극협회의 슬로건인데, 우리는 실천 없이 정신적 희망만 갖는 것인 아닌가, 이젠 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고 돌아봤다.

“이 연극이 하나의 지침이 돼 우리가 더 멋있게 살 수는 없을 지라도, 최소한의 선은 지키면서 살아가자는 마음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썼어요. 제 삶 역시 흔들릴 때마다 ‘보도지침’을 썼다는 것을 되뇌며 다잡을 수 있는 증거물이기도 하고요.” (오세혁)

그의 이야기를 듣던 김 전 위원장은 “오 작가는 시대 정신을 담은 조금 더 적극적인 연극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연출가이자 작가”라고 했다. 오 작가는 현재 박정희 정권 시절 강제 해직당한 언론인 모임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다룬 작품도 구상 중이다.

1986년 ‘보도지침’ 폭로 사건 다룬 연극 ‘보도지침’의 실존 인물 김주언 전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 극본을 쓴 오세혁 작가와 연극에 출연 중인 배우들. [마포문화재단 제공]
연극 ‘보도지침’, 시대와 세대 넘어선 생명력…꾸준한 운동으로 확산

연극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사건과 사건의 주인공은 변치 않았지만, 한 편의 대본은 다섯 번의 시즌 동안 매번 다른 배우와 연출가를 만났다. 김 전 이사장이 연극 ‘보도지침’을 관람하는 것은 이번이 다섯 번째. 그는 “연극은 올해로 8주년을 맞았는데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의미와 해석이 달라지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보도지침’은 시대 상황에 따라 다른 관점으로 연출됐다.

김 전 위원장은 “2016년 초연 당시였던 박근혜 정권 말기엔 사실 전달에 충실했다면, 현재 윤석열 정부에선 간접적인 방식의 언론통제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라며 “연극 안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부각하는 것도 현 정부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와 비슷한 맥락에 있다”고 봤다. 초연 당시엔 “1980년대의 이야기와 2016년의 이야기를 쉴틈없이 섞어 과거와 현재를 동일선상에 올렸다”는 것이 오 작가의 설명이다.

1986년의 보도지침 폭로 사건 이후에도 ‘보도지침’은 직, 간접적으로 계속 됐다. 2013년엔 윤창중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 당시 KBS 내부에서 보도지침이 유출됐고, 2016년 6월엔 2014년 세월호 참사 보도 관련 KBS 보도국에 압박을 가한 ‘비망록’이 공개됐다. 당시 김시곤 보도국장의 입을 통해서다. 당시 김 전 위원장은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을 설득해 이 비망록을 세상에 공개했다.

김 전 위원장은 “지금은 직접적 (보도) 통제의 시대는 아니지만, 공영방송 사장이나 간부를 교체해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간접 통제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며 “비단 정치 권력만이 아니라 자본 권력, 이들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발언을 판단이나 평가 없이 받아쓰기 하는 것 역시 간접적 통제 방식이자 보도지침”이라고 봤다. 언론개혁시민연대를 이끌며 헌신한 그에게 언론 개혁은 여전히 미완이다. 38년의 긴 세월이 흘렀지만 시시각각 후퇴하는 언론 환경을 마주한 심경은 착잡하다.

“반국가 세력이 암약하고 있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얘기를 듣는 순간, 유신 시절로 다시 돌아간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주언 전 위원장)

1986년 ‘보도지침’ 폭로 사건 다룬 연극 ‘보도지침’의 실존 인물 김주언 전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과 연극에서 김 전 이사장을 연기하는 황두현. [마포문화재단 제공]

연극은 시대와 세대를 관통해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김 전 위원장은 “2024년의 ‘보도지침’은 진실한 ‘말의 힘’, ‘독백의 의미’에 방향성을 둔 철학적 연출이 강조됐다”고 봤다. 2024년 식의 연출과 이야기는 세대와 성별, 직업을 넘어 공감하는 생명력을 얻었다. 배우들은 스스로를 바꾸고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 연극에 참여했고, 전국의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의 연극부에선 ‘나만의 지침’을 찾으려는 세대들이 공연 허락을 요청한다. “한달에 많게는 4~5번씩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현재도 이화여대, 서울시립대, 고려대에서 공연 중이다. 지난해엔 홍콩의 한 극단에서 낭독공연을 하기도 했다. 김 전 위원장은 “이게 바로 작가의 힘”이라고 했다.

쏟아지는 말들의 시대에 언론은 신뢰를 잃은지 오래다. 기자는 ‘기레기’(기자+쓰레기)로 불리는 시대다. 김 전 위원장은 지금도 언론인으로의 정도(正道)를 고민한다. 김 전 위원장은 “중요한 것은 언론인은 우리 사회와 정치, 권력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가진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권력의 랩도그(애완견)도, 어택도그(공격견)도 아닌 워치도그(감시견)로의 역할이 기자들의 덕목으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언론계에 일평생 몸 담은 그의 고민은 김주혁의 마지막 독백에도 담긴다. “그 시대의 표정과 함께 분노하고 슬퍼하고 저항하면서, 마침내 언젠가 웃게 될 그 날을 상상하면서. 계속해서 오늘의 역사를 감당하는 것. 오늘의 무게를 질문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언론입니다.” 오 작가는 “말이 홍수를 이루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무엇을 믿고 나아갈지 균형을 잡고, 나의 길이 확고해지는 지침을 찾는 계기를 삼기 위해 이 공연을 올리고자 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며 ‘보도지침’이 시대와 세대를 넘어 꾸준한 운동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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