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따듯함과 단호함이 어우러지는 판결문
부산에 벚꽃 명소가 여러 곳 있지만 학장천 벚꽃도 많은 사람이 추천하는 곳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학장천 맑은 물이 무심히 흐르고, 투명한 물 속에 비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벚꽃 그림자는 세상 근심을 잊게 한다.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こもれび·고모레비) 속에서 싱그런 풀 내음을 맡을 수도 있고, 푸르른 하늘을 나는 새의 비상을 감상할 수도 있다.
그런 학장천 옆으로 누구도 눈길조차 주고 싶어 하지 않는 건물이 있다. 자유를 반납당하는 대신 나라로부터 먹고 자는 것을 제공받는 곳, 재판이 확정되지 않았기에 법적으로는 무죄추정을 받지만 대부분 실형 선고를 받으므로 사실상 감옥으로 인식되는 곳, 바로 주례구치소이다. 누구인들 구치소에 가고 싶을까마는 누구라도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빌린 돈을 못 갚아서, 운전하다가 사고를 내어서, 관련 규정을 잘 몰라서, 규정은 아는데 지킬 수 없어서, 잘못한 것 없는데 억울하게(?) 가기도 한다.
구치소로 면회를 가는 많은 사람을 보면서, 판사로서 법원에서 재판을 할 때 보지 못했던 이들의 모습이 변호사인 지금은 가슴 깊이 전해지기도 한다. 누구를 만나러 오는지 모르겠지만, 엄마의 가슴에 안긴 채 잠든 얼굴로 오는 아기도, 양손을 잡은 어른 사이에서 즐겁게 깡총거리며 오는 호기심 가득한 어린이도, 세월의 풍상을 겪은 얼굴 가득 남에게 말 못할 사연을 안고 오는 한숨 짓는 노인네들도, 모두 다양한 얼굴로 이곳을 찾는다. 하루 면회 시간 5분, 10분을 위해 하루를 모두 보내는 것이 안쓰러워 너무 힘들게 다니지 말라고 당부하면 “이렇게라도 와야지 집에서 도저히 있지 못하겠다”는 대답을 듣고는 한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남편이 수감되자 면회가 가능한 날에는 빠지지 않고 면회를 하고, 면회를 할 수 없는 날에도 구치소 담장 옆을 거닐며 자신이 찾아 왔음이 남편에게 전해지기를 기도하곤 했다. 피해자가 있거나 고의적인 잘못이 아니라 절차적 위반으로 인한 것임을 잘 알기에, 과연 처벌 대상이 되는지, 필요성이 있는지 하는 의문이 변호사인 나도 확신할 수 없는 사안이어서, 여러모로 안타까웠는데 그 애절함이 내게도 느껴졌다.
물론 개개인의 안타까운 사정을 맞추어서 형을 정할 수는 없지만, 이런 사정들이 차가운 판결문에도 어느 정도는 반영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생긴다. 예전 형사 재판 사건 하나가 생각난다. 마약 투약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항소한 사건으로, 몇 달 후 어선 선원으로 출항해야 하는 피고인이 1심 판결 선고대로라면 출항 예정일 이후에 석방이 되니 징역형을 2달만 줄여주면 만기 출소 후 출항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출항 시기를 놓치면 1년 뒤에야 나갈 수 있는데 그 동안 일자리도 없어 막막하다는 이야기였다. 급여 체계 등에 대해 물어보니 선원인 점은 맞는 것 같았고, 출항 시기도 맞는 것 같았다. 1심 판결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 이상 항소심에서는 1심 판결을 변경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예정된 날 출항할 수 있도록 두 달을 감형하는 판결을 선고했다. 형을 줄이려고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으리라는 마음으로, 앞으로 배 타서 돈을 벌고 가정 이루고 신산한 삶이 조금은 따뜻해지기를 마음으로 바랐다.
이후 그 사건은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멀리 해외 외항선에서 팩스로 보냈다는 편지가 대법원을 통해서 내 책상에 도착했다. 사건 번호를 통해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2개월 감형 덕분에 무사히 출항해서 멀리 외국에 나와 있다고, 몇년 지나면 한국에 돌아가는데 앞으로는 잘못 저지르지 않고 열심히 살겠다며 2달의 감형에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법원 판결이 개개인의 사정을 모두 들어주어 들쭉날쭉 해서도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기계적이고 일률적으로 차가워서도 안된다는 점을 깨닫게 해 주었다.
추운 겨울날에는 동료의 따뜻함이 고마울 수 있지만, 더운 여름날에는 바로 옆 동료를 증오하게 하는 까닭에 여름이 죄수들에게는 더 힘든 시절이라는 신영복 씨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한 구절이 생각나는 여름 날, 판사님들의 판결문에 따뜻함과 단호함이 마술처럼 어우러지기를 기도해 본다. 재판을 하는 판사님도, 재판을 받는 당사자들에게도 지혜와 신뢰가 머무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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