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포도밭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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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거리는 아침 햇살이 산등성이에 가득하다.
나는 기지개 켜며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을 바라본다.
사흘 동안 나는 포도는 물론이고 포도주를 원 없이 섭취했다.
평소 비싸서 주저하던 사과와 자두, 무화과도 질릴 때까지 먹었더니 아침마다 갓 구운 빵과 곁들여 나오는 홈메이드 과일잼마저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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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거리는 아침 햇살이 산등성이에 가득하다. 나는 기지개 켜며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을 바라본다. 좁은 언덕길을 한참 걸어가도 보이는 건 포도밭 뿐이다. 겹겹 야트막한 산 전체가 포도밭이며 드문드문 농가가 있다. 신선하고 달콤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켜본다. 산책하다가 목마르면 잘 익은 사과를 따서 먹으면 된다. 자두나무 아래엔 막 떨어진 짙은 자줏빛의 굵은 자두가 수북하다. 깨물면 입속으로 태양 빛의 꿀이 쏟아져 들어오는 맛이 난다. 사흘 동안 나는 포도는 물론이고 포도주를 원 없이 섭취했다. 평소 비싸서 주저하던 사과와 자두, 무화과도 질릴 때까지 먹었더니 아침마다 갓 구운 빵과 곁들여 나오는 홈메이드 과일잼마저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 여긴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 같은 곳이다. 이름도 젤레나 오아차(Zelena Oaza), ‘초록 오아시스’라는 뜻의 간판을 건 파머스하우스이다.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프투이와 인접한 시골 마을에 있는 포도농장 겸 숙소인데 30대 초반의 젊은 부부가 대를 이어 이 집에 살며 손님들에게 숙식을 제공한다. 슬로베니아에는 현재 성업 중인 파머스하우스가 300채 정도다. 대다수가 울창한 숲속에 있는데 호숫가와 해변, 스키장 근처에도 적지 않다. 이 나라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지대와 수많은 계곡, 비옥한 산림지대로 이루어져 있어서 예로부터 국민은 곡물과 과일 농사 축산업 임업 등에 종사해 왔다고 한다.
이들이 고향을 지키며 생업을 포기하지 않도록 정부 차원에서 파머스하우스를 지원하며 홍보하기 때문에 자국민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온 여행객들도 이런 농가에 머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슬로베니아의 평범한 주민이 거주하는 집의 게스트룸에서 지내며 이들이 주로 먹는 전통 요리를 먹고 함께 산책하거나 대화 나누는 것은 어떤 관광보다 살아있는 경험이다.
나는 3박 4일 일정으로 여기서 생활하고 있다. 슬로베니아 국제시축제 ‘데이즈 오브 포에트리 앤 와인’에 초청받아 왔는데, 본행사 나흘 전부터 열린 번역워크숍, 이후에 개막식에 참석한다. “말이 번역워크숍이지, 포도밭 한가운데 며칠 감금되어 노동하는 거잖아!”라고 어떤 시인들이 투덜거린다. 혼자 있는 시간에 익숙하며 고독이 필요한 내게는 이번 합숙 워크숍이 생소하고 힘겹다. 매일 빠른 템포로 활동해야 한다. 오전 8시 조식, 오전 9시~12시 번역 워크숍, 낮 12시 점심과 휴식, 오후 2시~5시 번역워크숍, 오후 5시 30분 낭독회로 이어진다.
번역하기 어려운 작품들을 받았을 때, 원어와 딱 들어맞는 단어와 문장을 찾지 못할 땐 그나마 자유시간이 없다. 하지만 번역하는 동안 작품과 사랑에 빠져버린다. 행사 총괄하는 슬로베니아 작가와 한국어, 슬로베니아어가 유창한 번역자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서 온 세 명의 시인과 슬로베니아의 시인 세 명이 한 지붕 아래 생활하며 집중적으로 양국의 시를 자신의 모국어로 옮긴다. 당일 번역한 작품 15~20편 정도를 가지고 인근 작은 도시의 광장 도서관 식물원 등으로 가서 한국어와 슬로베니아어로 시를 낭독한다. 객석에는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온 아이들도 있고 백발의 노인분들도 계시다. 기자들의 취재 열기가 뜨겁고 텔레비전 카메라가 우리의 낭독 모습을 포착한다.
“회색빛 큰 호수 속에서 구름이 이리저리 움직입니다/물에 발을 담그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생각에 잠긴 듯한 미지근한 호숫가에 /그리고 흰 털이 수북한 개 한 마리가 뭉게구름처럼 걸어 다닙니다/작은 초록색 벌레가 내 팔꿈치에 떨어집니다/벌레여, 제발 좀 숨을 쉬세요”
토네라는 시인이 쓴 시 ‘구름을 따라’ 마지막 부분이다. 그는 슬로베니아 류블라냐에서 태어났고 올해 71세이다. 매일 아침 식사 후에는 휴대용 다관에 녹차를 우려내어 마시는데 동양 문화에 관심이 많다. 맑고 투명한 서정으로 미물에 깃든 생명력을 통찰력 있게 노래한다. 시에는 국적이나 젠더, 피부색 같은 경계를 허물며 공감하고 소통하게 하는 신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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