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삼의 인생 이모작…한 번 더 현역 <59> 통일연구원 조현정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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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운명은 무엇으로 결정될까? 명리학자들은 태어난 연·월·일·시의 사주(四柱)로 설명하지만 영향이 큰 다른 요인이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당사자가 스스로 선택할 수 없음이 참 아이러니한데, 이 중에서 국가를 바꾸며 가혹한 운명을 부수어버린 사람이 있다.
가치 있는 삶에 대한 고민은 부자 되기만을 원했던 그녀에게는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계절이 지나는 이 시간에도 그녀는 자기 운명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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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하러 건너갔던 중국은 별천지
- 외할머니 굶어죽자 한국행 결심
- 당국에 잡혀 북송되고 다시 탈출
- 영화 같은 루트로 2003년 입국
- 밤낮으로 일하며 돈 모으는 재미
- 방통대 다니며 가치있는 일 관심
- 박사학위 따고 통일연구소 꾸려
- 국책 연구기관 위원으로 활동도
◇ 조현정의 이모작 귀띔
- 꿈을 이루려면 행동하라
인간의 운명은 무엇으로 결정될까? 명리학자들은 태어난 연·월·일·시의 사주(四柱)로 설명하지만 영향이 큰 다른 요인이 있다. 바로 태어난 시대·국가·부모이다. 여러 경우를 볼 때 개인의 운명은 이 프레임 속에서 거의 결정되지 않나 싶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당사자가 스스로 선택할 수 없음이 참 아이러니한데, 이 중에서 국가를 바꾸며 가혹한 운명을 부수어버린 사람이 있다. 죽음을 불사하고 북한을 탈출한 여성이다. 우리는 서울역 토론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 북한의 한 병사가 남한으로 귀순했더군요. 선생도 탈북민 신분이시죠?
▶기초 의식주가 위협받는 북한의 상황이 더 나빠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2003년에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온 탈북민입니다. 벌써 21년이나 지났군요.
오늘 만난 이는 탈북민 조현정(49) 박사다. 그녀는 현재 우리나라 평화통일 정책을 연구하는 국책 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인생이모작기의 자기 운명을 어떻게 개척하고 있을까? 비밀의 빗장을 열어보자.
-어떻게 통일연구원에서 일하게 되셨나요?
▶올해 1월부터 출근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남한으로 와서 대학원을 다녔고 북한학 석사 및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마침 탈북민 출신 박사를 공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응모해 저도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북한에서 어떤 계기로 탈북하셨던 건가요?
▶굶주리는 삶을 벗어나기 위해서였습니다. 북한은 1995년부터 경제 위기로 인해 배급시스템이 붕괴되고 ‘고난의 행군’이 계속되면서 아사자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굶어 죽겠다 싶어 22세인 1997년 처음으로 두만강을 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태어나서 살던 북한을 완전히 떠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단지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와 집도 사고 장사 밑천을 만들려는 생각뿐이었죠. 말하자면 생계형 탈북이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가니 세상이 별천지라서 너무나 놀랐었습니다.
-별천지요?
▶북한에는 매체가 조선중앙TV 하나밖에 없었기에 외부 세상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가보니 한국 미국 드라마와 영화가 많더군요. 정말 믿을 수 없는 별천지의 세상이 있었어요. 연길시에서 본 붉고 노란 네온사인을 보며 지난 세월 속고만 살아왔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폭발했어요. 하지만 북한으로 돌아가 외할머니와 고깃국도 먹으며 지내야 한다는 생각에 식당이나 농사 일을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외할머니께서 아사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애통했습니다. 저는 부모 없이 외할머니 슬하에서 자랐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되고 보니 저는 저주받은 북한 땅에 돌아갈 이유가 없어져 버리더군요.
-그래서 남한으로 오셨군요.
▶결과적으론 그렇지만 사연은 엄청납니다. 남한으로 오기 위해 중국 남부의 난닝을 거쳐 라오스로, 미얀마로 몰래 스며 들어갔다가 신분이 노출되어 북송된 적도 있고요. 그때가 1999년 1월이었습니다. 10년 형을 선고받은 우리는 죽지만 않았을 뿐이지 산목숨이 아니었습니다. 인생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께서 보위부에 뇌물을 써서 저는 6개월, 남편은 1년 만에 출소했어요. 2000년 여름이었죠. 생지옥 속에서 자유로운 세상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어요. 결국 2000년 겨울에 가족들과 다시 중국으로 탈출했고, 그곳에서 숨어 자유로운 남한 땅으로 올 기회를 엿보았죠. 그러다가 2002년 드디어 태국의 방콕으로 잠입했고, 우여곡절을 많이, 많이 경험한 끝에 2003년 8월 한국으로 왔습니다.
영화 같은 우여곡절 끝에 그녀 가족은 2003년 8월 인천공항으로 입국했다. 당시 그녀는 어린 아들과 함께 활짝 웃으며 입국하여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입국하는 다른 탈북민과 달랐다.
-28세에 꿈에 그리던 삶이 시작되었군요. 한국에서 무엇을 가장 하고 싶으셨어요?
▶부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저는 외할머니가 굶어서 별세하신 북한에서 탈출해 왔잖아요. 하나원에서 나올 때부터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10년 안에 내 집을 마련한다는 결심도 했죠.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남한은 어떤 사회로 보였나요?
▶자기가 노력하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사회이더군요. 심리학자 매슬로우 이론으로 보자면 북한은 최하위 단계인 생존에 급급하지만, 남한은 스스로 노력하면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나라더군요. 저는 특히 시간에 주목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촘촘히 짜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저는 충남 서산에 살게 되었는데 맨 처음 신문 배달 일과 보험설계사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신문 배달은 시간을 쪼개어 새벽부터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보험설계사는 노력한 만큼 돈을 번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남한은 인맥 사회이기도 한데 연줄도 없이 힘들지 않으셨나요?
▶아니요. 일이 너무나 재미있었어요. 한 5년을 진짜 자지 않고 즐겁게 뛰어다녔습니다. 새벽 2시부터 밤 10시까지 신문 배달 보험영업 마트 출납원 등을 시간대별로 소화해 내었죠. 연줄은 없어도 열정으로 이겨낸 거예요. 그리고 그런 일들을 통해 저는 나날이 더 성장할 수 있었어요. 월수입도 800만 원 가까이 되었고요. 그러다가 2008년에 강원도 속초의 한 골프장 캐디로 이직을 했는데 이 경험이 저에겐 엄청난 인생 선물이 되더군요. 뭐냐 하면 10년 안에 집을 갖겠다는 목표를 7년 만에 달성했고요. 캐디 일의 들쑥날쑥한 빈 시간을 통해 방송통신대를 다니며 공부에 눈을 뜬 것입니다.
-공부에 눈을 떠요? 또 한 번 더 인생 전환인가요?
▶저는 남한에 와서 총 30여 가지의 일을 했습니다. 아마 상상 못 하실 겁니다. 그러나 저는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방통대를 다녀 2013년 38세에 졸업했는데, 공부를 하면서 가치관의 변화가 오기 시작했어요. 돈만 보고 사는 이 삶이 최선인가? 인생에 정녕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가치 있는 삶에 대한 고민은 부자 되기만을 원했던 그녀에게는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고민은 곧 엄청난 인생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북한 사회와 통일한국을 연구해 보고 싶었습니다. 결국 여차저차하여 북한학과가 있는 이화여대 대학원에 진학했죠. 그리고 너무나 운 좋게 교내외 장학금으로 큰 도움을 받으면서 석박사 대학원 과정을 다닐 수 있었고, 2020년 드디어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탈북자 출신에 나이까지 45세이니 핸디캡이 많았는데, 학위 받은 해에 코로나19가 와서 강의나 연구 길이 다 막혀버렸어요.
-또다시 힘들게 되었군요. 어떻게 하셨나요?
▶그래서 ‘좋다! 이참에 남한에 와서 대학원을 나온 탈북민 연구자들을 모아 연구단체를 만들자’고 결심했습니다. 체제의 통일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통일도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통일에 대비해 남북한 사람들을 잘 잇는 연구를 하기 위해 ‘이음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현재 20여 명의 탈북 연구자들이 함께합니다. 또한 이제 저는 자랑스러운 국책 연구기관의 연구위원까지 되었죠.
-운명을 타파해 온 조 박사님만의 비결은 무엇인가요?
▶살면서 어려움이 없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려움은 생명 있는 자의 기본값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려울 땐 일을 성취하고 난 뒤의 결과를 머리에 떠올리면 이겨내는 힘이 생기죠. 힘들지 않게 되죠. 일종의 최면요법입니다. 그리고 아들과 외할머니는 저를 지탱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손잡고 함께 넘어온 제 아이에게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고, 여기서 잘 사는 것이 굶어서 별세하신 사랑하는 외할머니께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에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요?
▶생각해 보니 저의 의식에는 늘 ‘교육’이 있었어요. 통일된 나라의 교육부 장관이 되고 싶습니다. 통일 이후에는 민족동질감 형성이 매우 중요할 겁니다. 남북한 사람들이 동질감 속에서 서로 존중하며 성장하는 경험을 쌓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녀는 신이 버린 북녘땅에서 조실부모까지 했으니, 초년에는 운명이 버린 사람이었다. 하지만 매사에 긍정적이고 강한 성취욕구를 가진 여인으로 성장하여 매 순간 난관을 돌파해 왔다. 그녀 스스로는 이 모든 것이 외할머니의 사랑과 칭찬 덕분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운명은 인간의 손에 달렸다는 말이야말로 참 진리다. 그 힘 덕분인지 그녀는 국경을 넘어서까지 운명을 개척해 왔다. 영원을 향하는 불길로 무엇이든 태워버릴 품세다. 계절이 지나는 이 시간에도 그녀는 자기 운명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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