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예술로 담은 한중일 작가

정주원 기자(jnwn@mk.co.kr) 2024. 9. 3.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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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고재 공동 전시 개막
시각장애에 대한 편견 짚은
엄정순의 '코 없는 코끼리'
中의 도시화·문명 성찰한
기하학적 추상화가 딩이
치하루의 붉은색 실 설치작
삶과 죽음, 관계 등 드러내
엄정순 작가의 '코 없는 코끼리' 등이 설치된 전시장 전경. 학고재·양이언 작가

4일 개막하는 대형 글로벌 아트페어 '프리즈·키아프 서울'로 미술계가 들썩이는 이때,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 화두를 던지는 전시가 열린다. 서울 종로 학고재에서 10월 5일까지 열리는 전시 '잃어버린 줄 알았어!'다.

전시 제목은 중의적이다. 뭔가를 잃어버렸단 깨달음일 수도, 혹은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외침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관람객은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먼저 질문하게 된다. 공동 기획자이자 중국 상하이 퉁지대의 이용우 교수는 "정말 잃으면 안되는 것을 잃어버렸다는 반성적인 의미가 있다"며 "예술과 건축이 사회적 합의에 기여할 수 있는 점을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작품을 건 한국의 엄정순(63), 중국의 딩이(62), 일본의 시오타 치하루 (52) 등 세 작가도 저마다 예술의 공동체 정신과 사회적 역할을 고민해왔다.

정식 개관을 하루 앞둔 지난 2일, 예술의 역할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토론회도 마련됐다. 이 교수가 사회를 보고 엄정순·딩이 작가가 참석한 가운데,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재단의 마누엘라 루카-다지오 디렉터, 조민석 건축가, 중국 퉁지대의 리샹닝 교수, 중국 관둥시 허미술관의 샤오슈 관장, 아키라 관장, 예술이론가 심상용 서울대 교수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예술이 사회와 관계를 맺으며 공동체 담론을 생성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마누엘라 디렉터는 "이번 전시의 작가들에게 공동체적 참여는 개인적 영감이 되고 있다"며 "각 작품은 사회적 관계성 안에 놓이면서 더 큰 의미를 갖게 된다"고 평했다. 리샹닝 교수도 상하이의 다양한 예술 프로젝트 사례를 소개하며 "우리의 일상 생활은 예술의 특별한 의미 부여를 받을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이런 의미가 잘 담겼다"고 말했다.

먼저 엄정순은 1996년 사단법인 '우리들의 눈'을 설립해 시각장애 학생들과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작가다. 언젠가 여행 중 가까이 맞닥뜨렸던 동물 코끼리를 소재로 '본다'는 의미를 탐색해왔다. 이 가운데엔 '코 없는 코끼리'도 있다. 보통 작품은 만지지 않는 것이 상식이지만, 이 작품은 예외다. 엄 작가는 시각장애 학생들이 느끼고 표현한 코끼리 형상을 철판으로 재현하고 몸체 표면을 울 직물로 덮었다. 사람들 손길이 닿으면 보푸라기가 생기기 쉬운 재질인데, 작가는 벽에 이 보푸라기도 걸어뒀다. "수십만 사람들의 터치가 담긴 보푸라기들, 이것도 코끼리"라는 게 그의 메시지다. 우리 속담에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라는 말은 보통 '일부만으로 전체를 판단한다'고 비꼬는 표현이지만, 작가는 이것도 뒤집어 본다. 오히려 보이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들과 달리 가까이 다가가 실체를 파악하려는 노력 그 자체를 예술로 환기한다.

딩이 '십시(十示) 2022-10'(2022).

중국의 딩이는 '무의미'를 뒤집어 의미를 창조해낸 중국 기하학적 추상화의 선구자다. 1986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40년 가까이 '+' 혹은 'x' 모양만으로 그림을 그렸다. 단순한 평면일 것 같지만, 손으로 그은 선에선 운동성이 느껴진다. 다양한 색채 덕분에 어떤 캔버스는 우주 같고 또 다른 캔버스는 초원 같다. 이번 전시엔 올해 완성한 작품들과 1980년대~2020년대 과거 작품을 골고루 선보인다.

이런 작업은 중국의 1966~1976년의 파괴적인 문화대혁명과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의 산물이기도 하다. 딩이는 서구 현대미술의 영향, 중국 전통성의 재발견 등 거대한 급류 속에서 새로움을 추구했다. 딩이는 "초기엔 색채·재료 자체로 실험을 하다가 점차 중국의 대도시화, 이집트·인도 등 새로운 문명 등을 주제로 작품에 표현했다"고 소개했다.

시오타 치하루 'Cell'(2022).

일본의 치하루는 실과 사물로 만든 설치작품으로 삶, 죽음, 관계 등을 다룬다. '존재의 상태'(State of Being) 연작은 빽빽한 붉은 실 뭉치로 엮인 직육면체의 박스 공간 안에 책, 편지 등이 들어 있다. 작가는 기억과 연결된 일상적 물건으로 정체성을 드러낸다. 과거 전시됐던 거대한 배와 실을 연결한 작품은 이민자·난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때 붉은 실은 피와 생명을 직관적으로 떠오르게 하고, 물체들을 연결하는 동시에 공간 속에 차단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의 작품 전시를 기획했던 일본 구사마 야요이 미술관의 다테하타 아키라 관장은 "다가갈 수 없다는 점에선 죽음과 부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는 절망이라기보다 그 너머를 초월해가는 회복성과 구원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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