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치금융 그림자 자본시장 역주행
기업- 투자자 갈등, 시장서 자율 조정
해결안되는 경우에만 법원 최후 개입
금융당국은 세세한 개입서 손 떼야
보통의 인식과는 달리 '제도'라는 개념에는 법령뿐만 아니라 오랜 경험을 통해 축적된 관습과 불문율이 포함된다. 국회에서 제정하는 법률과 행정부에서 구체화한 시행령·시행규칙은 사회 각 부문을 규율하는 최소한의 규범일 뿐이다. 오히려 분야를 막론하고 시장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넘을 수 없는 선'이라는 한계가 있다면 그게 진정한 제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자본시장에 투자자를 보호하고, 자본의 효율적 배분을 증진하기 위한 '제도'라는 것이 있는지 의문이다. 세세한 법령과, 이를 어겼는지 감독하는 금융당국의 깐깐한 간섭은 있지만 실제 시장 참여자들이 생각하는 관습과 불문율, 즉 '넘어서는 안되는 선 내지 정도'는 없는 것 같다.
주식시장에서 불공정거래 행위를 막는 온갖 방법에도 아직 시장에는 주가조작이 성행한다는 믿음이 팽배해 있다. 과징금 제재를 도입하고 부당이득을 박탈하겠다고 했어도 실제 주가조작을 자행한 범죄자가 금융당국의 행정적 제재는 물론이고 법의 심판을 받은 경우에도 패가망신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오히려 크게 한 건 해 먹은 뒤 잠시 감방에서 고생하면 큰돈을 남길 수 있다는 믿음은 굳건하다.
증권시장이 개장한 지 70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불법과 반칙이 판치는 자본시장으로 남아 있는 것은 금융당국의 세세한 개입이 그 원인이다. 사고가 터질 때 마다 금융당국은 민간에서 다툼을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자정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개입해서 감독하는 권한을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파두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작년 뻥튀기 상장으로 수많은 투자자들을 울린 파두 사태가 터졌을 때 금융당국은 기업공개(IPO)를 위한 증권신고서를 심사하면서 제출 직전 월까지의 매출액과 영업손익 등을 '투자 위험 요소'에 적절히 기재했는지 확인하겠다고 했다.
투자자 보호에 당국이 직접 나선다는 좋은 모양새를 취할 수는 있었겠지만, 과연 이런 방식으로 해결할 문제인가?
한국 자본시장에서 IPO를 할 때 상장주관사와 회계법인은 기업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할 의무가 없다. 시가총액·매출액·영업이익 등의 재무적 요건과, 주주 구성·거버넌스·회계감사 결과 등의 비재무적 요건이 포함된 서류를 제출해야 하지만, 증권신고서 제출 시에 1번만 내면 된다.
미국은 다르다. 처음 증권신고서를 제출할 때는 물론이고 상장 절차가 종료될 때 무조건 업데이트된 재무확인서(comfort letter)를 발행해야 한다. 또 주가를 산정할 때에도 추가로 필요한 시간이 있는데 이때에도 업데이트된 확인서(bring-down comfort letter)를 내야한다.
미국이 이처럼 하는 이유는 소송이 남발하는 미국 자본시장의 토양과 이를 유도한 강력한 법 때문이다. 빅4 회계법인에서 해외 상장 업무를 하는 A파트너는 "실제 미국에서는 새로 상장된 기업 사례 5건 가운데 1건 정도는 투자자들로부터 소송을 당한다"고 했다.
자연히 미국에서 상장주관사와 회계법인은 재무확인서를 발행하거나 기업실사 결과를 보고할 때 극도로 큰 책임감을 느낀다.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거나 과장된 정보가 들어가면 소송에 휘말려서 막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되기 때문이다.
최근 두산그룹의 사업 재편 추진 과정에 여러 번 제출된 증권신고서를 금융감독원이 반려하고 있는 사례에서도 관치금융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제120조는 증권신고서에 대해 제2항에서 수리 행위의 성격에 대해 알리고 있다. 여기서는 법에 열거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수리를 거부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증권신고서를 수리하는 행위는 민간에서 이뤄지는 일에 대한 금융당국의 소극적이고 사후적인 확인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당국의 관여는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는 입법자의 태도가 법에서도 명백히 확인된다.
민간 기업의 사업 재편에 따른 증권신고서 제출에 대해 수리를 거부함으로써 민간의 경제활동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투자자와 기업의 자유로운 소통과 갈등 해결의 경험을 박탈하는 행위이다.
미국이 가진 진정한 경쟁력의 원천은 고도로 발달한 자본시장이다. 그리고 미국 자본시장이 발달한 원인은 투자자와 기업들이 소통하고, 갈등을 빚다가 결국은 소송을 통해 정의 구현이 실행된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마치 항생제를 계속 쓰면 면역력이 약해지듯 투자자 보호를 미명으로 한 관치금융은 되레 한국 자본시장이 효율적인 자본 배분과 투자자 보호가 이뤄지는 시장으로 거듭나는 것을 방해하고 있을 뿐이다.
[최희석 기자]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군대서 만난 남편과 결혼”...미인대회 결승 진출한 여성의 정체 - 매일경제
- [단독] “까먹었다면 빨리 인출하세요”…한때 가입자 100만 카드의 몰락 - 매일경제
- “낼 모레 60인데”...국민연금 가입기간 못채운 207만명, 그런데 세대별 보험료율 차등? - 매일경
- 아내 기절시킨 뒤 男72명 모집해 성폭행 사주한 남편…가담자 26세부터 73세까지 ‘경악’ - 매일
- “엄마, 오늘도 또 꽃게 먹으라고?”…가격 착해진 해산물, 온난화 역설 - 매일경제
- “1억 벤츠, 1년만에 ‘반값’ 날벼락”…‘아파트 화재’ EQE, 5천만원대로 폭락 - 매일경제
- ‘바나나우유 대박’ 신유빈, 또 경사났다…올림픽 탁구 포상금 3000만원 - 매일경제
- “내일 가격 떨어져요 조금만 넣으세요”…어느 주유소 사장 ‘양심고백’ 화제 - 매일경제
- ‘환자 사망’ 양재웅, 하니와 9월 결혼 연기...“언제 할지는 미정” - 매일경제
- “지금껏 뛰었던 곳 중 가장 큰 클럽” 황인범, ‘송종국·김남일·이천수’ 품었던 네덜란드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