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슈베르트 가곡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잊지 못할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1925~2012)의 마지막 제자, 바리톤 벤야민 아플이 한국을 처음 찾았다. 10주년을 맞아 클래식 음악 분야까지 문화예술사업 확장 계획을 발표한 한세예스24문화재단의 첫 이벤트인 ‘2024 여름에 만나는 겨울나그네(Winterreise)’ 공연이 늦여름의 끝인 5일 오후 7시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의 음악적 유산을 계승한다고 인정받는 벤야민 아플은 독일 바이에른에서 태어난 은행원 출신이지만, 2009년 오스트리아 슈바르첸베르크에서 열린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 마스터클래스에서 피셔디스카우에게 매료되어 마지막 제자가 됐다. 2012년 5월 사망할 때까지 그를 지도한 피셔디스카우는 아플에게 노래 뿐 아니라 음악 해석, 무대 표현 등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3일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벤야민 아플은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한국 방문이 기쁘다. 문화강국인 한국에서 독일의 대표 문화수출상품인 ‘겨울나그네’를 선보이게 돼서 영광”이라고 말했다. 백수미 한세예스24문화재단 이사장도 “한국과 동남아 문화교류를 위해 설립되어 미술과 문학 영역에서 사업을 펼쳐왔지만 첫 음악 프로젝트인만큼 한번도 내한한 적 없는 아티스트를 소개하고 싶었다”면서 “벤야민 아플은 너무 잘생겼고, 첫 작품으로 선정한 슈베르트 ‘겨울나그네’와 인연이 깊은 그를 여러 전문가의 추천을 받아 선정했다”고 밝혔다.
피셔디스카우의 사망 3주전까지 가르침을 받았다지만, 아플이 피셔디스카우의 ‘불멸의 목소리’를 계승한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의 발성은 전혀 다르다. 아플은 “내 삶에서 그를 만난 건 최고의 선물이었다. 28살에 처음 만나 4년 동안 모든 레퍼토리를 다뤘다”면서도 “그는 영웅과 같은 음악가이지만 단순히 모방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피셔디스카우는 50년 넘게 매일밤 연주회에서 작곡가의 의도와 곡에 담긴 배경을 연구해 자신의 음악을 창조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고, 그에게서 가장 크게 배운 점”이라고 했다.
피셔 디스카우의 깊이 있는 해석과 무대 매너를 계승한 아플은 2012년 독일 슈베르트 협회의 ‘독일 슈베르트 상’을 수상했고 2014년부터 2016년까지 BBC 라디오 3의 ‘뉴 제네레이션 아티스트’, 2015/16 시즌 바비칸 센터 런던 선정 ‘ECHO 라이징 스타’로 뽑혀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바우, 필하모니 드 파리 등 유럽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공연하는 리트 스페셜리스트로 자리매김했다.
이번 공연은 영국왕립음악원 교수인 피아니스트 사이먼 래퍼와 함께 연주한다. 프로그램인 ‘겨울나그네’는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가 빌헬름 뮐러(1794-1827)의 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Song Cycle)이다. 24개의 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실연으로 인한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서 방황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슈베르트의 대표작이자 독일 리트의 정수로 평가받고 있다. 첫 번째 부분 (1-12곡)에서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성에게 거절당한 후, 겨울 풍경 속을 방황하며 자신의 슬픔과 절망을 노래한다. 두 번째 부분 (13-18곡)에서 주인공은 희망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좌절한다. 세 번째 부분 (19-24곡)에서 주인공은 죽음을 맞이하며, 자신의 삶을 회상한다.
아플은 '겨울나그네'와 인연이 각별하다. 2022년 영국 BBC의 영화 프로젝트 ‘겨울기행’에 출연해 90분에 걸쳐 ‘겨울나그네’ 전곡 연주와 인터뷰를 수록했다. 같은해 알파 클래식스에서 앨범도 발표해 “벤야민 아플은 이 연작의 모든 섬세한 부분을 독창적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 작품에 잊을 수 없는 해석을 선사한다.”(프랑스의 디아파종지 리뷰)라는 평가와 함께 만점을 받았다.
벤야민 아플은 '겨울나그네'에 대해 “200년전의 작품이지만 시간을 초월한다. 지금 독일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이 사용되는데 엄청난 깊이가 있다. 시와 음악이 완벽하게 결합된 형태이고, 주인공인 젊은이가 깊은 영혼까지 내려가는 내면의 여행을 떠나는 용기있는 사람이다. 24개의 곡을 통해 내면의 모든 감정을 일일이 살펴보며 자기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개인적인 작품이다. 각자가 처한 상황과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흥미롭고, 21세기에 적절한 작품이다. 한국 관객은 젊다는 이야기 들어서 기대가 되고, 독일 최고의 문화수출품인 가곡을 잘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다.
재단은 이번 공연을 시작으로 매년 정기적으로 양질의 음악 공연을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한국 성악 공연이 오페라와 스타 음악가들의 리사이틀에 치우쳐 있는 상황에서, 슈베르트나 슈만 등의 가곡을 선택해 위대한 시인들의 문학 작품에 아름다운 선율이 깃들여진 공연에 집중한다고 밝혀 주목된다. 특히 양질의 공연을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올해는 가용 좌석의 1/5 가량을 추첨 방식으로 초대했다.
백수미 이사장은 "올해는 처음이라 조심스레 진행해 왔는데 대중들의 관심이 커서 놀랍다. 내년에도 가곡 위주로 거장급 아티스트 섭외를 고려중"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