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짐짝이냐"… 화물용 엘리베이터만 쓸 수 있는 배달기사들

송주용 2024. 9. 3.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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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고급 아파트, 승객용 승강기 사용 제한
"입주민, 외부인 출입에 불편 민원 많아서"
기사들 "배달 오래 걸리고 자괴감 든다"
"법 위반은 아니지만... 절충점 마련 필요"
화물용 엘리베이터 타보니 정말 덥죠? 이러다 배달기사들 쪄죽습니다.
일부 아파트와 주상복합건물에서 배달기사들에게 승객용 승강기가 아닌 화물용 승강기만 타도록 해 배달기사들이 반발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달 서울 시내 한 카페에서 배달기사가 주문한 음식을 들고 나서는 모습. 뉴시스

역대급 폭염이 연일 이어지던 지난달 12일. 배달기사 이용식(47)씨는 주문 음식을 배달하기 위해 서울 강남구의 고급 아파트에 들어섰다. 로비에서 방문 호수를 적자 건물 직원은 입주민용 엘리베이터가 아닌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라고 안내했다. 30층이 넘는 높은 아파트에 구비된 한 대뿐인 화물용 승강기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자 아래로 한 번 출렁이더니 배달지인 13층까지 천천히 올라갔다. 평소 택배 물품과 이삿짐, 크고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데 쓰는 승강기라 사방에 플라스틱 소재 보호대가 둘러쳐져 있었다. 고급 아파트에 걸맞지 않은 침침한 분위기. 8월 한낮에도 에어컨이 나오지 않아 이씨는 금세 땀으로 젖었다.

이씨는 "강남 일대 아파트, 주상복합 건물 대부분은 배달기사들에게 화물용 엘리베이터만 쓰게 한다"며 "배달이 몰릴 때면 내부가 복잡해져 크고 작은 다툼도 일어난다"고 말했다. 이어 "한 번에 수십 개씩 물건을 날라야 하는 택배나 부피가 큰 가전·가구를 배송한다면 아파트 조치를 이해하겠지만, 우리가 배달하는 것은 단지 입주민이 시킨 작은 음식 하나"라며 "배달기사라는 존재를 마주쳐선 안 되는 짐짝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 서글프다"고 토로했다.


"입주민 불편 민원에 화물용 승강기만 허용"

배달기사 이용식(47)씨가 지난달 12일 서울 소재 한 고급 아파트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배달에 나섰다. 송주용 기자

인근의 또 다른 주상복합 아파트. 1층엔 유명 프랜차이즈 매장이 즐비한 이곳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 건물은 1층에서 배달기사에게 신분증이나 물건을 담보로 받고 출입카드를 내주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물론 이용할 수 있는 승강기는 화물용 엘리베이터 한 대뿐이다. 3년 전부터 강남 고시원에 거주하며 배달일을 하고 있다는 50대 박광호씨는 "이런 건물은 콜(배달 수락)을 받고 싶지 않지만 배달 플랫폼에서 필터링을 안 해주니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이씨는 이 건물 관리팀에도 승객용 엘리베이터를 개방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날 만난 관리팀 직원은 "주민들의 불편 민원이 너무 많고 입주자회의에서 정해진 내용이라 도와줄 방법이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주민 민원이란 ①배달기사들로 인해 엘리베이터 이용이 지연되고 ②헬멧을 착용한 기사들에게 위압감을 느끼거나 ③범죄자가 배달기사로 가장해 침입할 것이 우려된다는 것. 박씨가 "입주민들이 원한다면 1층 로비에 헬멧을 벗어두고 올라가겠다"고 말해봤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이 아파트 앞에서 만난 또 다른 배달기사도 "이 주변 건물들은 입주민이 아니면 전부 화물 엘리베이터만 이용하도록 한다"며 "배달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마음이 위축된다"고 말했다. 박씨는 "가족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할까 봐 배달일 하는 것을 숨기고 혼자 지내고 있다"며 "이런 대우를 받을 때마다 인간으로서 자괴감을 느낀다"고 하소연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에 따르면 이런 문제는 배달기사뿐만 아니라 택배기사, 우체국 집배원 등도 함께 겪고 있다.


위법은 아닌 승강기 차별…"대안 고민해야"

배달기사들은 안전상의 이유로 여름철과 점심시간만이라도 승객용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게티이미지뱅크

배달기사들은 입주민용 엘리베이터 사용 제한이 차별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 같은 행위가 차별은 맞지만 법률상 '불법 행위'는 아니라고 봤다. 문제 해결이 어려운 이유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법률원 소속 조혜진 변호사는 "건물 소유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재산권을 어떻게 행사할지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며 "입주민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차별은 맞지만, 배달기사의 업무를 제한하는 수준까진 아니기 때문에 법을 어겼다고 보긴 힘들다"는 의견을 냈다.

배달기사들도 입주민 주장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 때문에 대안을 마련하자는 입장이다. 이씨는 "날이 너무 더운 여름철만이라도 열사병 예방을 위해 에어컨이 나오는 승객용 엘리베이터를 개방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박씨는 "배달 콜이 밀리는 점심시간에는 한두 시간만이라도 입주민용 승강기를 타면 상황이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조 변호사 역시 "배달기사에게 업무 중 안전상 문제가 발생한 것은 엘리베이터 이용 차별과는 또 다른 문제"라며 절충점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송주용 기자 juy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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