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아파트 관리비까지 법으로 해결한다면
낡은 엘리베이터 교체도 못 해
법정이 된 정치, 양극화 불붙여
고발·특검·탄핵이 늘 능사인가
“(입주자 대표 회의‧입대의) 전 회장이 관리비 계좌를 압류하였습니다.”
최근 살고 있는 아파트 1층 출입구에 붙은 짧은 공고문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입대의 내부 갈등이 상당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관리비 계좌에 압류가 들어온 건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사정은 이렇다. 지난해 선출된 회장 A씨에 대해 일부 동 대표(입대의는 동별로 대표를 선출해 구성된다)와 주민이 올 4월 해임을 시도했다. A씨는 절차상 문제가 있다며 가처분 소송을 걸어 인용(승소) 판결을 받았다. 다시 주민 투표가 추진됐고 A씨는 해임됐다. 이에 대한 효력 정지 가처분 소송과 몇몇 동대표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진행 중이다. 승소한 첫 번째 가처분 신청에 대한 재판 비용(400만원)을 받기 위해 해당 금액만큼 압류 신청을 한 것이다.
급여와 이권이 없는 입대의 갈등이 소송까지 가는 건 흔치 않다. 한 대형 법무법인 변호사는 “개인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건 것은 상대를 법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성격이 짙다”며 “그만큼 갈등의 골이 깊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역설적으로 A씨는 소송 이후 민심을 더 잃었다. 직접 투표로 이뤄진 해임 표결은 투표율 22.1%, 찬성 94.5%로 가결됐다. 주민 입장에서 입대의 활동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그만큼 손해이기 때문이다. 운행 중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사고가 몇 달 전 한 종합편성채널에 소개됐을 정도로 관련 아파트 업무의 논의가 중단된 상황이다. 동 대표 사퇴가 이어지면서 28동 가운데 13동이 궐위다. 소송으로 선을 넘은 갈등이 어떻게 수습될 수 있을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일상생활에 법정의 논리가 침투하면 이래서 위험하다. 전자가 조정과 타협을 근간으로 한다면, 후자는 결국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찰에 고발돼 진술서를 쓰거나, 민사 소송 당사자가 돼 변론을 준비하는 순간 칼날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긴장감과 공포, 그리고 분노가 치밀기 마련이다. 변호사 비용은 차라리 작은 문제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수사에서 피고였던 이들이나, 정권 교체 이후 거꾸로 입장이 바뀐 민주당 인사들을 만나 보면 상대방에 대한 증오와 어떻게든 정권을 움켜쥐어야 살 수 있다는 강박증이 묻어나곤 한다. 정책에서 차이는 적지만, 상대에 대한 적대 수위가 높아지는 정서적 양극화의 원인 중 하나는 법정에 의존하는 정치 행태에 있다.
두 세계의 작동 원리가 다르기 때문에, 법정에서 승리에 연연하다 정치적으로 패배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른바 ‘여론의 법정’이란 문제다. 재판이나 수사에서 무죄를 받으려고 변호사들이 취하는 행태를 정치 영역에서 보게 되는 건 이제 드물지 않다. 쟁점을 쪼개고, 비틀며 오묘한 법리를 들이대며 사안을 회피한다. 그럴수록 여론은 싸늘해진다. 재벌 오너 일가들이 얽힌 사건에서 가끔 볼 수 있었던 위기 대응 실패 과정이다. 거꾸로 명확한 위법 행위에도 정치적인 생존, 나아가 성공까지 거머쥐는 부조리한 사례도 늘고 있다.
정치를 법정으로 만드는 행태에 소외되는 건 유권자다. 중도 유권자일수록 상대 정치인에게 고소‧고발을 일삼고, 걸핏하면 재판이나 탄핵을 외치는 행태에 불만이 적잖다. 먹고사는 문제에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정치 구조를 만들기 때문이다. 2021~2024년 주요 선거 결과는 거대 양당에 대한 불만과, 극히 유동적이 된 표심을 보여주었다. 고발, 재판, 특검, 탄핵을 밥 먹듯 외치는 행태에 똑같이 대응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법정의 논리를 앞세워 시시비비를 가리는 정당이 아니라 정치의 논리로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성과를 내는 정당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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