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47] 즐거운 비
수묵 추상으로 한국 현대미술에 한 획을 그은 산정 서세옥(山丁 徐世鈺·1929~2020)의 ‘즐거운 비’다. 글자 그대로 ‘비 우[雨]’를 닮았다. 붓이 머금은 먹과 물의 양에 따라, 붓을 쥔 손이 종이 위에 머물다 떠난 시간에 따라 건묵과 농묵이 교차하며 먹구름이 되고, 점이 되고, 그 점들이 빗물이 됐다. 이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 장맛비나 ‘보슬보슬’ 떨어지는 봄비가 아니고, ‘추적추적’ 흐르는 가을비도 아니라, 굵고 여린 빗방울이 뒤섞여 한꺼번에 툭툭 후드둑 하고 급히 떨어지는 한여름 소나기다. 점 밖의 흰 여백은 한 장의 종이에 불과하나, 그 안에서 한없이 너른 공간이 느껴지고, 갑작스레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으며 활개 치는 어린아이가 떠오른다.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산정은 시(詩)와 서(書)의 바탕에서 그림을 시작해 종이와 붓, 먹의 심오한 본질을 파고들어 수묵을 통한 무한한 조형의 가능성을 열었다. 1960년, 서른을 갓 넘긴 즈음 ‘묵림회(墨林會)’를 결성하고, 산수와 인물 등 전통적 소재에 천착하던 당대 한국화에서 탈피하여 단순한 점과 선만으로 이루어진 혁신적 화풍을 이룩했다.
산정의 그림은 ‘자(字)’와 ‘상(像)’ 사이를 오고 간다. 다시 생각하니 ‘즐거운 비’가 ‘雨’를 닮은 게 아니라, ‘雨’가 ‘즐거운 비’를 닮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여기서 빗물을 만든 건 오로지 화가만의 일이 아니라 종이와 수묵의 일이기도 했다. 지면(紙面)을 타고 스미는 먹물이 빗물이 되는 경지, 종이에 남은 수묵의 습한 기운이 비오는 날의 촉촉한 공기처럼 느껴지는 경지, 그렇게 지필묵이라는 매체가 형상이 되고 심상이 되는 경지가 바로 산정 서세옥이 일생을 통해 이루어낸 화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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