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포스트잇] [35] 행복하려는 사람들의 불행한 사회

이응준 시인·소설가 2024. 9. 2.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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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설가는 전임교수였다. 총장파(派)와 반(反)총장파 교수들의 충돌이 계속됐다. 비리나 범죄 때문에 벌어진 투쟁이 아니라, 권력 정쟁(政爭)이었다. 후지기로는 양편이 마찬가지고, 해결도 타협도 없어 보였다. 당쟁(黨爭)이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다만, 자신이 얼마나 넌더리 나는 모임의 추한 일원인지 따져볼 필요는 늘 있다.

환멸이 싫다고 해서 생활이 보장된 직장을 때려치운다는 게 예나 지금이나 쉬운 노릇은 아니지만, 소설가는 사직했다. 한데 문득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 채 저 양편 속 혹은 그 사이에서 견디고 있을 누군가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는. 그는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급소(急所)’이며 이 점을 잊지 않아야 민주주의자가 아닐까 싶었다고 말했다.

옳은 그의 그 말에도 교정할 부분은 있다. 민주주의(Democracy)라는 용어는 ‘민주제도(民主制度)’로 교체하고, 민주주의자는 ‘자유’민주주의자로 한정하는 게 좋다. 민주정치는 주의(ism)가 아니라 제도다. 인간과 제도의 ‘불완전성’을 잊지 않는 게 도그마 파시즘, 좌익과 우익 파시즘 등에 빠지지 않는 첩경이요, ‘민주’를 참칭(僭稱)하지 않는 독재와 파시스트는 없는 까닭이다.

화가로도 성공한 유명 노(老)가수가 있었다. 그의 그림을 거의 다 대신 그려준 유령 화가의 등장과 폭로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때까지 대중은 그 가수에게 그런 존재가 있는지 전혀 몰랐고 그의 그림은 붓질 하나하나 그가 직접 작업한 거라 믿었더랬다. 유령 화가에게 낮은 임금과 인간적 모멸을 상습한 사실은 덤으로 빈축을 샀다. 한 진보(?) 평론가가 그 가수를 옹호하고 법원이 무죄를 판결한 것은 존중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현대미술 이론과 현행법이 공히 그 가수의 그림을 그 가수의 창작물이라고 손들어줬는데, 왜 사람들은 그 가수의 그림을 예전처럼 대접해주지 않을까? 왜 저 가수의 화가 행세에 남의 붓질이 고소거리가 되었으며 무죄 판결 뒤에도 인정(認定) 장애가 지속되는 것일까? 대중이 진보 평론가보다 무식해서? 그건 핵심이 아니다. 많은 화가가 어시스턴트를 데리고 작업을 하지만 그건 유령 화가가 아니라 ‘조수 화가’다. 게다가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가수에게는 특히 그가 직접 붓질을 하는 것까지를 포함해 그림값과 존경을 지불했던 것이다. 사법적 결과와 상관없이 그가 가짜 화가로 전락하게 된 이유다.

이럴 때 그 가수는 제 그림이 진짜라고 떠들어대기 전에 나는 가짜 화가가 아닌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이렇게 진실이란 이론과 법 사이에 숨어 있기도 한데, 우리는 살면서 이런 것들을 ‘민주제도의 급소’처럼 자주 놓친다. 복잡하고 섬세한 내막에 단순한 대답만을 강요하면서 죄인으로 몰아가거나, 정반대로 괴물을 옹호하는 일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 많다. 정답을 정해놓고 묻는 최악의 질문들이 우글거리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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