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기의시대정신] 세 마녀는 살아있다
탐욕을 먹이 삼아 거짓을 쌓아올려
윤리·책임 잊은 미디어 간교한 환청
사회 갈등을 헤집으며 자꾸 커져가
고전의 힘은 시대를 관통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최근 연극으로 만났다. 욕망과 죄의식 사이에서 폭주하는 맥베스는 배우 황정민이 연기했다. 맥베스 부인 역의 김소진, 동료 뱅코우 역의 송일국 등 배우들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대단한 무대였다. 하지만 연극이 끝나고 돌아가던 길, 귓가에 이명처럼 남은 건 세 마녀의 기괴한 목소리였다.
최근 영국을 혼란에 빠트린 대규모 폭력 사태가 그렇다. 사건은 리버풀 북부 해변 마을에서 시작됐다. 지난 7월29일, 어린 소녀들의 댄스 교실에 한 청년이 난입해 무차별 칼부림을 벌였다. 6살, 7살, 9살, 세 아이가 사망하고 8명의 어린이와 2명의 어른이 다쳤다. 끔찍한 사건 직후 사람들의 분노를 불쏘시개 삼아 거짓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범인이 무슬림 망명자라는 가짜뉴스였다. 흥분한 군중은 모스크와 난민 숙소에 몰려가 불을 지르고 돌을 던졌다. 폭동은 전국으로 번졌고 경찰 등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거짓 정보가 폭력으로 바뀌기까지 단 24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8월18일, 스페인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친구들과 축구를 하던 11세 소년이 한 청년의 흉기 난동으로 잔혹하게 살해됐다. 사건 직후 용의자가 북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라거나, 난민 출신이라는 허위 정보가 빠르게 퍼졌다. 사건 발생 30시간 만에 붙잡힌 범인이 백인 남성이라는 게 밝혀지지 않았다면 또 어떤 폭력이 재생산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자유롭고 열린 만남에서 진실이 더 악화될 수 있다는 걸 누가 알았을까.” 소셜미디어 등을 타고 가짜뉴스가 횡행하는 현시대를 꼬집은 듯한 이 문장은 놀랍게도 17세기 영국 시인 존 밀턴의 말이다. X(옛 트위터)의 공동창업자 에번 윌리엄스도 같은 고백을 남겼다. “모든 이가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정보와 아이디어를 교환할 수 있게 된다면 세상은 더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이 틀렸더군요.”
세 마녀의 유혹과 유럽에서 벌어진 가짜뉴스 사건들의 핵심은 교묘한 언어가 인간의 가장 약한 고리(그것이 탐욕이든 이기심이든 불안이든 혹은 극심한 슬픔이든)를 건드려 혼란의 트리거를 당긴다는 데 있다. 실제로 영국과 스페인 가짜뉴스 사건의 밑바닥에는 오랜 경기침체로 쌓인 분노, 이로 인한 반이민 정서가 응집되어 있었다. 여기에 국민의 분노를 자양분 삼는 정치적 목적이 개입됐다. 가짜뉴스를 막아야 할 정치인들이 오히려 이를 부추겼다.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가짜뉴스를 키워내기에 더 최적의 생태계를 갖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스마트폰 보급률이라는 물리적 환경이 그렇고, 세계 최고 수준의 소셜미디어 이용률이라는 사회적 환경이 그렇다. 여기에 툭하면 서로를 악마화하고 진영 논리로 괴담과 음모론을 퍼 나르는 첨예한 진영 대립까지 도사리고 있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건 우리 사회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좌절과 분노다. 최근 우리 국민의 절반(49.2%)이 장기적 울분 상태에 놓여 있다는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사 결과가 있었다. 젊은 세대가 특히 그러했다. 이들은 대학 졸업이나 취업, 결혼, 출산 같은 인생의 전환점을 부모 세대보다 수년씩 늦추거나 포기한 ‘지각 세대’ ‘N포 세대’다.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는 비율도 가장 낮았다.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노리는 세 마녀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욕망을 뒤흔들고 갈등을 부추기고 거짓을 쌓아 올리는 세 마녀의 목소리는 17세기 소설을 타고 넘어와 오늘도 여전히 환청처럼 들린다. 윤리와 책임을 잊은 미디어, 가짜뉴스란 이름으로 여전히 살아있다. 이념을 가르고 지역을 가르고 계층과 세대와 젠더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속삭이는 세 마녀의 목소리가 2024년 대한민국에서 자꾸만 커지고 있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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