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란의시읽는마음] 드키는 소리

2024. 9. 2. 23:17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떠듬떠듬 또박또박 노모의 책 읽는 소리가.

"드키는 소리"를 오래오래 간직하려고.

밤이 깊어가는 것도 잊은 채 아들의 새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마음.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박성우
늦은 밤, 노모 집에 든다 저녁을 먹었다고 말을 넣어두었으나 노모는 기연히 뭇국을 끓여 상을 봐두었다 밥을 안 먹은 사람처럼 밥 한 그릇을 비운 나는 노모가 막 끓여 내오는 돼지감자 삶은 물을 마신다 후룩 후루룩, 노모와 마주 앉아 시시콜콜 얘기 나눈다
 
여차여차하여 두어달 전에 낸 책 얘기를 꺼내는데 노모는 알아듣지 못한다 제가 그 책 안 드렸어요? (중략) 마침 가방에 있는 책을 꺼내 노모께 드린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 노모도 나도 제각기 방에 든다 불을 끄고 누워 잠을 청하는데 난데없이 글 읽는 소리 들려온다 (중략)
 
쪼맨허게 읽었는디 드키더냐?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떠듬떠듬 또박또박 노모의 책 읽는 소리가. 불을 끄고 누워 잠에 든 척 그 소리를 가만히 듣는 밤. 길고 긴 밤. 아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쩐지 겸연쩍으면서도 동시에 더없이 뜨거운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더 귀를 세우지 않았을까. “드키는 소리”를 오래오래 간직하려고. 삶이 고단할 때마다 약처럼 꺼내어 조금씩 아껴 들으려고.

"드키다”라는 말은 ‘들리다’를 이르는 어느 지역의 방언이리라. 그렇지만 이는 마치 시 속 노모만의 특별한 말버릇처럼 귀하고 사랑스럽다. “쪼맨허게 읽었는디 드키더냐?” 하는 말 역시 그윽히 아름답다. 짤막한 한마디에서 사람의 순실한 마음을 짐작하게도 된다. 밤이 깊어가는 것도 잊은 채 아들의 새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마음. 그렇지만 옆방의 아들이 행여 잠에서 깰까 다만 쪼맨허게, 쪼맨허게 읽어 내리는 마음.

그러고 보면 소중한 것들은 대부분 다 쪼맨허다. 귀를 기울일수록 또랑또랑해진다. 거대해진다.

박소란 시인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