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마을]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한겨레 2024. 9. 2. 21:55
내 속에 캥거루가 있다면 믿지 않겠지요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으니까요
캥거루가 새끼를 주머니에 안고 겅중겅중 뛸 때
세상에 별 우스꽝스런 짐승이 다 있네
그렇게 생각했지요
하긴 나도 새끼를 들쳐 업고
이리저리 숨차게 뛰었지만
그렇다고 내 속에 캥거루가 있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요
TV에서 캥거루가 권투를 하는 걸 보았어요
사람이 오른손으로 치면
캥거루도 오른손을 뻗어 치고
왼손을 뻗으면 다시 왼손으로 받아치고
치고 받고 치고 받고
사람이나 캥거루나 구별이 안 되더라구요
호주나 뉴질랜드 여행 중 느닷없이
캥거루를 만나게 된다면 나도 모르게 앞발을 내밀어
악수를 청할 수도 있겠더라구요
나는 가끔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인데
캥거루 주머니에 빗물이 고이면 어쩌나 하는 식으로
우리 애들이 살아갈 앞날을 걱정하지요
한번은 또 TV에서
캥거루가 바다에 빠진 새끼를 구하려다
물속으로 따라가 빠져 죽는 장면을 보여주더라구요
그 주머니를 채운 물의 무게와
새끼의 무게를 가늠하다가
꿈에서는 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지요
캥거루는 캥거루이고 나는 나인데
한밤에 이렇듯 캥거루 습격을 당하고 나면
영 잠이 안 오지요
이따금
캥거루는 땅바닥에 구멍을 판다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그 구멍으로 아무것도 안 한다네요
나도 쓸데없이 구멍을 파고
아무것도 안 하게 되네요
캥거루는 캥거루이고 나는 나인데
-2024년 현역 시인들 설문조사 결과 ‘가장 좋아하는 시’,
최정례의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문학과지성사, 201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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