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여성에게 자유를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인다”는 말을 남겼다. 성평등을 위한 조치에 매번 반대하고 젠더 갈등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지지층을 모아 국회 진입까지 성공한 정치인과 정당에 이 말이 적용될 수 있겠다.
텔레그램 딥페이크 사건은 젠더 간의 대립이라는 관점으로 볼 문제가 아니다. 동의를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의 얼굴 사진을 가져다 다른 사진이나 동영상에 합성하여 성착취물을 만드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용인될 리 없다. 교육을 해서 지식과 윤리의식을 심어주거나 변호사의 자문을 받아야 그게 위법이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는 사례도 아니다. 처벌법규 구성요건의 미비점 때문에 일부 사례의 경우 지금은 형사처벌을 할 수 없다 하더라도, 개인의 인격권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위법행위라는 점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딥페이크 성범죄가 사회 일반의 신뢰를 근본적으로 해칠 수 있다는 점은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자기 옆에 있는 누군가가 익명성 아래 숨어 딥페이크 성착취물을 만들거나 돌려보는 행위를 방치하면 피해자 또는 우리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기존의 성범죄와 달리 여기에는 ‘범죄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라는 구호조차 무기력해 보인다. 시민의 평온한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 다른 말로 하면 삶의 기본조건에 관한 민생 문제라는 얘기다. 책임 있는 공직자, 상식 있는 정치인이라면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데 뛰어드는 것이 당연하다. 성착취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대응을 요구하자, 이를 ‘급발진 젠더팔이’로 명명하는 것 자체가 젠더의 대립이 아닌 문제를 젠더 이슈로 만드는 것이다.
여성의 자유가 여러 모양으로 위협받고 있다. 텔레그램 딥페이크 사건이 알려진 후, 많은 여성들은 소셜미디어에서 자기 사진을 삭제하고 부모들은 미성년자 딸이 소셜미디어 사진을 내리거나 계정을 폐쇄하도록 하고 있다. 남성은 셀카를 올리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데, 여성은 다른 사람이 딥페이크로 악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셜미디어를 사용하고 셀카를 올릴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다.
이는 텔레그램 딥페이크에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어떤 여성은 ‘쇼트컷’(짧은 머리)을 했다는 이유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폭행을 당했다. 올림픽 3관왕 위업을 달성한 양궁의 안산 선수조차 쇼트컷을 했다는 이유로 온갖 악플과 비난에 아직까지 시달린다. 쇼트컷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남성이 시비를 걸거나 심지어 폭행을 하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한다면, 자기 머리 모양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본적 자유를 제한당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자유’라는 개념이 잘못 이해되고 사용되는 현상을 보게 된다. 타인의 기본적 자유를 앗아가는 행위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들이대거나 과잉 규제를 우려할 상황이 아니다. 자유를 의제로 내세운 집권세력이라면,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는 보수 정당이라면, 법과 질서를 수호해야 하는 권력기관이라면, 국민의 절반인 여성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
올해 초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의 딥페이크 사진이 유포된 적이 있다. 공연을 하면 국가의 GDP를 움직일 정도의 경제효과를 가져온다는 스타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딥페이크 피해를 겪는다. 이 사건에 관해 표현의 자유, 테크와 인권의 관계를 연구하는 조지 워싱턴 대학교 메리 앤 프랭크스 교수는 “이러한 AI 기술과 앱은 젊은 세대 남성에게 ‘내가 원하면 AI로 구현할 수 있다’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고, 이를 경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한 세대의 피해자뿐만 아니라 한 세대의 가해자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지금 그 불길한 진단이 현실화된 것을 보고 있는지 모른다. 한두 명이 아닌 한 세대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존재이유다. 교육받을 권리와 의무가 있는 미성년자를 공교육을 위해 학교에 보냈는데, 여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가 같은 교실에 있는 남학생에 의해 벌어졌다. 정부가 개입하여 안전한 학교를 만들지 않는다면 대체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한국이 당장 내일 침몰하지는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정치와 정부는 존재이유에 관한 근본적 의문에 직면해 있다. 딥페이크 지도를 개인이 만들어 공유해야 한다면,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할 권한이 있는 수사기관이 아니라 피해자 혹은 그를 돕는 활동가들이 나서 일일이 증거를 수집해야 한다면, 국가와 정부의 존재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유정훈 변호사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공군 대령, ‘딸뻘’ 소위 강간미수···“유혹당했다” 2차 가해
- 김재섭, 윤 대통령-명태균 통화 “부끄럽고 참담···해명 누가 믿냐”
- [스경X이슈] ‘나는 솔로’ 23기 정숙, 하다하다 범죄전과자까지 출연…검증 하긴 하나?
- 친윤 강명구 “윤 대통령, 박절하지 못한 분···사적 얘기”
- 70대 아버지 살해한 30대 아들, 경찰에 자수…“어머니 괴롭혀와서” 진술
- [한국갤럽]윤 대통령, 역대 최저 19% 지지율…TK선 18% ‘지지층 붕괴’
- [단독] ‘김건희 일가 특혜 의혹’ 일었던 양평고속도로 용역 업체도 관급 공사 수주↑
- 김용민 “임기 단축 개헌하면 내년 5월 끝···탄핵보다 더 빨라”
- 미 “북한군 8000명 러시아서 훈련 받아…곧 전투 투입 예상”
- “선수들 생각, 다르지 않았다”···안세영 손 100% 들어준 문체부, 협회엔 김택규 회장 해임 요